068. 53년 전 '피의 무지개'가 다시 떴다

<1972년 10월 26일 · 베트남 닌호아 하이난거리>

by 부지깽이

오후 한 시. 따가운 햇볕이 쏟아지고 메마른 먼지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그곳, 골목 어귀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바로 장춘동이었다.

왼쪽 귀 윗부분을 감은 붕대에서는 여전히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틈새마다 굳어버린 핏자국이 얼룩처럼 박혀 있었다.

그의 걸음은 위태롭게 휘청거렸고, 두 눈은 굶주린 맹수처럼 불안정하게 떨렸다.


며칠 전, 반 뜨엉의 총탄이 왼쪽 귀를 스친 후 그는 더 이상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분노가 그의 존재를 집어삼켰다.

뜨엉을 잡지 못하자 격앙된 감정이 살기로 터져 나왔고, 그 살기는 린에게로 향했다. 린과 뜨엉, 분명 그들은 모종의 연관이 있었다.

그 의심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이난 거리.

찻집 문에는 여전히 '한국군 장병 출입금지' 팻말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 금지령이 장춘동의 발목을 잡지 못했다.

그는 찻집 맞은편 골목에 몸을 숨긴 채, 그곳을 꿰뚫어 볼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문이 열리고 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햇빛이 그녀의 검은 머리칼을 비추자 윤기가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어깨에는 얇은 천이, 한 손에는 잔받침과 접시가 들려 있었다.

장춘동의 눈동자가 움찔하며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린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뎠다.

장춘동은 먹잇감을 향해 조용히 다가서는 짐승 같았다.

느릿했지만 집요하게 린에게 다가섰다.


붕대로 칭칭 감긴 얼굴 너머로 그의 표정은 섬뜩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왼쪽 눈썹 아래 미세하게 경련하는 근육은 그의 내면이 얼마나 위태로운 광기 위에 서 있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린, 오랜만이군.”

목소리는 놀랍도록 낮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속에는 병든 집착과 활활 타오르는 화산 같은 분노가 역겹게 뒤섞여 스며들어 있었다.

“잘 지냈나? …난, 네가 없어서 잘 못 지냈거든.”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장춘동의 손이 번개처럼 날아가 린의 손목을 낚아챘다.

린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며 비명을 토해냈다.

“이것 놔요!”

그녀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렸지만, 눈은 달랐다.


어떤 공포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증오였다.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울분이 린의 검은 눈동자 안에 차갑게 응고되어 빛났다.

“김 일병, 당신이 죽였죠?”

린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호함이 칼날처럼 박혀들었다.


장춘동은 순간 동작을 멈췄다.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커졌다.

‘어떻게 알았지? 그걸 알 리가 없는데….’

하지만 이 순간, 그런 의문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죄책감이나 두려움은 그의 뇌리에서 완전히 지워진 지 오래였다.


오히려 린의 손목을 더욱 거칠게 움켜쥐며, 그의 입가가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린… 클럽으로 가자. 잠시 이야기 좀 하자.”

그는 힘으로 린을 질질 끌어당겼다.

린은 발을 땅에 단단히 박고 버티며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이거 놔요! 싫어요!”

그때였다.

찻집 문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열리고, 한 남자가 맹렬한 기세로 뛰쳐나왔다.

리차드였다. 그의 얼굴엔 평소의 여유로운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리차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장춘동에게로 돌진했다.

하이난 거리의 작열하는 열기보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노가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그 손, 당장 놔.”

짧은 영어 억양이 섞인 한국어가 칼날처럼 뚝 떨어졌다.

그 말과 동시에 리차드는 린을 툭 밀어내듯 뒤로 물리고는, 곧장 장춘동의 가슴팍을 세차게 밀쳤다.

장춘동의 손아귀에서 린의 손목이 마침내 풀려났다.

린은 숨을 헐떡이며 뒤로 물러섰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리차드의 주먹이 장춘동의 턱을 정통으로 강타했다.

“크윽—!”

장춘동이 크게 휘청였다.

그는 싸움에 능한 자였지만, 지금 한쪽 귀에 붕대를 감고 있는 상태였다.

무엇보다 리차드의 정체가— 미군 정보부 소속이라는 사실이 그의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쳤다.

그는 단순한 미국인이 아니었다. 그 자체가 힘이었다.

리차드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숙이 파고들어 장춘동의 복부, 갈비뼈, 어깨에 정확하고 잔인한 각도로 주먹을 꽂아 넣었다.

장춘동은 비틀거리며 벽에 부딪혔다.


숨이 가빠오는 그 찰나, 리차드가 그의 앞에 성큼 다가섰다.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만 린 앞에 나타나 봐.”

낮은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살기처럼 뻗어 나갔다.

“그땐, 진짜 죽여버린다.”

주변은 순식간에 정적에 잠겼다.

근처에 있던 군인 둘, 거리를 지나던 민간인 여럿.

모두가 그 장면을 숨죽이며 지켜봤다.


그것은 싸움이 아니었다. 징벌이었다.

장춘동은 모멸감에 온몸을 떨었다.

입술을 깨물었고, 두 눈은 피가 돌 듯 벌겋게 충혈됐다.

그리고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채, 휘청거리며 달아났다.

백마부대가 주둔한 방향으로.

그의 뒤통수에서 시뻘건 분노가 이글거리며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그 순간, 그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장춘동은 피와 땀에 절어 막사로 돌아왔다.

그의 온몸은 먼지와 흙투성이였다.

그보다 더 짙은 분노로 얼룩져 있었다.

막사 문을 박차고 들어서자마자, 그는 무작정 고함을 질렀다.

“다 꺼져! 다 죽여버릴 거야, 이 개새끼들아!”

주먹이 날아들고, 군화가 나뒹굴었다.

식기통, 주전자, 총기 손질용 오일통까지—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집어던졌다.

한순간 막사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누구도 그를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장기동 중위조차 2박 3일 출장으로 다른 부대에 나가 있었다.

밖에서는 갑작스레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열대 특유의 짧고 굵은 장대비였다.

번개도 천둥도 없이, 그저 하늘이 울지도 않고 조용히 통곡하는 것처럼 세차게 쏟아졌다.

그러나 장춘동의 분노는 그 비조차 식히지 못했다.


그렇게 몇 시간— 막사에 박힌 땀과 피, 비 내음이 뒤섞여 엉켜가는 오후였다.

소나기가 그쳤다. 하늘은 서쪽에서부터 천천히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장춘동의 눈이 섬뜩하게 반짝였다.

“이제 때가 됐군.”

그는 분대원 넷을 호출했다.

분대원들은 그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 시각, 규는 경비중대 막사 안에서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가슴 어딘가가 콱 막힌 듯 답답했고,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불길한 예감이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문득, 바깥 문을 열자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붉은 노을 아래, 소나기를 머금은 끼엠마을 상공의 구름이었다.

규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끼엠마을 경비초소에서 초병이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규는 외쳤다.

“긴급상황이야! 소대장에겐 말했어!”

그는 그렇게 경계선을 뚫고 마을로 향했다..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끼엠 마을 뒤편, 밀림 위로—무지개가 떴다.

“… 그 무지개다.”

규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란 걸….


규는 숨을 몰아쉬며 뚜엣의 집 앞에 도착했다.

그의 손이 거칠게 문을 두드릴 때, 안에서는 조용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뚜엣!… 뚜엣”

문이 살짝 열리고, 불안에 휩싸인 뚜엣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품에는 이제 막 잠에 빠져든 아기가 안겨 있었다.

뚜엣은 품에 안긴 담요 속 아이, 탄을 더 깊이 감싸 안았다.

뚜엣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몸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규의 눈빛을 보자마자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규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거친 숨결은 그의 마음이 얼마나 다급한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 순간, 규는 조용히 손가락을 입에 댔다.


“쉿!~”

그 짧은 동작은 규와 뚜엣이 처음 만난 날, 숲 속에서 그녀가 했던 바로 그 동작과 정확히 일치했다.

“지금 당장, 동굴로 피해야 해.”

규의 단호한 말에 뚜엣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규의 손길에 이끌려 언덕 아래 작은 동굴로 향했다.

그녀는 몸을 숙여 동굴로 들어가 탄을 안고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녀는 거친 숨을 고르며, 담요를 감싸며 말했다

“아가, 조금만 참자. 아무 일 없을 거야. ”

그 말은 아이에게 한 것이었지만, 사실은 자신을 향한 절박한 다짐이었다.

규는 동굴 밖 바위 뒤에 엎드려 마을을 응시했다.


잠시 후—

탕, 타타탕!

끼엠 마을에서 섬뜩한 총소리와 함께 불길이 솟구쳤다.

그 핏빛 일렁거림은 규의 얼굴을 잔혹하게 물들였다.

규의 손과 무릎, 등줄기가 세차게 떨려 왔다.

마을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맹렬한 불길은 초가집들을 집어삼켰고, 시커먼 연기는 마을 사람들의 숨통을 조였다.

울음소리, 비명소리가 뒤섞였고, 그 모든 것을 끝내는 총성이 울려 퍼졌다.

탕, 탕, 타타탕!

갑자기 들이닥친 죽음의 그림자가 시커먼 물처럼 골목마다 끈적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 참혹한 비극의 중심에 장춘동이 있었다.

얼굴을 감았던 붕대는 이미 벗겨져 나갔고, 얼굴은 피칠갑이 되어 있었다.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이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남은 건 오직 살육 본능과 섬뜩한 광기뿐이었다.

그의 첫 타깃은 평소 눈엣가시 같던 ‘촌장’이었다.

“이 늙은 새끼가…!!”

총성이 울렸다. 촌장의 머리가 부서지며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놀라 날아오르는 닭들을 향해 분대원 하나가 총을 난사했다.

탕, 타타탕, 타타타탕!

장춘동과 분대원들은 움직이는 모든 것을 향해 총알을 퍼부었다.

집집마다 불을 질렀고,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는 피의 밤이었다.

촌장을 해치운 장춘동은 다음 타깃을 향해 잔인한 걸음을 옮겼다.

뚜엣의 집에 도착해 하늘에 대고 총을 난사했다.


그리고 비릿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자, 이제 나와! 안에서 타 죽기 싫으면…”

하지만, 조용했다. 아기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장춘동이 문짝을 발로 차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집안엔 아무도 없었다.

장춘동의 눈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이런, 썅!!!”

그는 피에 굶주린 성난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분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집 주변 다 뒤져! 어디 숨었을 거야. 찾으면 끌고 와”

그때, 장춘동의 시야에 뚜엣의 이웃집 마당이 들어왔다.

그 곳엔 중년 부인이 분대원 둘에게 질질 끌려 나와 있었다.


뚜엣이 탄을 낳을 때 아기를 받아준 이웃집 여자였다.

그녀의 품에는 네댓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안겨 있었다.

그녀는 아이를 온몸으로 감싸 안고, 무릎을 꿇은 채 공포에 떨고 있었다.

장춘동은 천천히 다가가 총구를 아이의 이마에 들이밀었다.

“옆집에 사는 뚜엣—어디로 도망쳤지?”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말해. 사실대로 말하면—너랑, 니 애는 살려줄게.”

그 순간, 주변이 숨죽이 듯 고요해졌다.

그녀의 눈은 공포와 절망으로 가득 찼다.

아이의 목숨이 자신에게 달렸다는 압박감과 이웃을 죽게 만들 수 없다는 결심이 뒤섞여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장춘동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의 눈빛은 마치 사냥감이 덫에 걸리기를 기다리는 포식자처럼 차갑게 빛났다.

잠시 후—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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