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4월 · 베트남 닌호아 하이난거리>
며칠 뒤, 흐린 하늘 아래 하이난 거리 끝자락에 자리한 미군 전용 찻집 ‘버터플라이’는 누군가의 숨결 하나조차 들키지 않으려는 듯,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겉보기엔 소박한 찻집.
하지만 이곳은 베트남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카페였다.
커피, 홍차, 생맥주, 위스키까지—취급하는 품목은 세련됐고, 가격은 거리의 여느 찻집보다 두세 배는 훨씬 비쌌다.
자연스레, 손님의 출입도 제한적이었다.
찾아오는 이는 대부분 미군 장교나 하사관. 계급이 낮거나 외부인들은 가게 문턱조차 넘기 어려웠다.
특히—단 한 사람은 더.
「한국군 하사 장춘동, 절대 출입금지!!!」
리차드 한이 직접 카페 사장에게 당부한 철칙이었다.
그 한 줄의 규칙은, 린에게 운명을 바꾸는 문장이 되었다.
지옥 같은 밤들을 지나, 이 작은 공간에서 린은 마침내 다시 ‘사람답게 숨 쉬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하얀 셔츠에 검정 앞치마를 두르고 단정하게 묶은 머리 뒤로 은은한 향기가 스며 나왔고, 그녀의 얼굴엔 오랜만에, 진짜 웃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 웃음은 단지 입꼬리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눈매를 부드럽게 감싸며, 가게 안의 공기마저 따스하게 물들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차드는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를 지켜주는 사람이 된다는 것. 그건 어떤 말보다, 훨씬 묵직한 책임이었다.
열흘 후, 하늘은 드물게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햇살은 ‘버터플라이’ 앞마당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그날 오후, 찻집 골목 앞에 낯익은 얼굴들이 서 있었다.
박규. 리차드, 김 일병. 그리고 뚜엣.
잠시 후—찻집 입구에서 하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린이었다. 사장의 배려로 잠시 외출을 허락받은 그녀는 햇살을 머금은 하얀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고,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뚜엣이 그대로 달려갔다.
“린…!”
둘은 말없이 서로를 껴안았다.
그리고 터지는, 따뜻한 눈물과 웃음. 그 웃음소리는 골목을 타고 번져나갔고, 그 순간만큼은 전쟁도 슬픔도 햇살 아래 그림자 하나 드리우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던 김 일병이 두 손을 입에 모으고 걸쭉하게 외쳤다.
“아따! 오늘 날씨 죽이네요잉~ 워메? 이거시 누구시다냐?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녀님들 아니신게라?”
규는 피식 웃었고, 뚜엣은 가볍게 눈을 흘겼다.
린은 그런 분위기가 낯설면서 따뜻했다.
그녀의 눈꼬리가 천천히, 부드럽게 휘어졌다.
리차드는 팔짱을 낀 채 말없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