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헤아려보다.
흘러넘치는 생각을 쓰다 보면, 헤아려질까.
라디오 방송이 들린다.
운전하다 터널에 들어갔을 때보다 더 전파간섭이 심한가 보다. 여러 주파수의 방송 소리가 두서없이 왔다 갔다 한다.
그 와중에 지지직 대는 주파수 조정 소리마저 껴들어댄다. 견디기가 어려웠다.
머릿속에 수동식 라디오를 떠올린다. 동그랗고 툭 튀어나온 라디오 파워 전원 버튼을 여러 번 눌러보지만..
라디오 소리는 꺼지질 않는다.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제발 라디오 소음이 꺼지길 바랬다.
어젯밤 잠들기 전 이부자리에서의 내 모습이다. 머릿속인지 마음속인지 내 속에서 끝없는 소리가 나온다.
생각이 그만큼 복잡하고 많았다. 멈추고 싶어 심호흡도 해보지만 멈추질 못한다.
몸은 피곤한데, 정신은 너무 또렷하다 못해 과다 활동을 했다. 결국 잠은 들었지만, 기어이 과민된 신경은 두통을 데려왔다.
남편이 간호간병 병동이 배정되어 홀로 입원했다. 남편은 병원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도 몇 걸음 못 가 어지러워하고, 숨이 차 하고, 힘들어했다.
결국 병원에 도착해서 급히 휠체어를 가져와 앉혀 입원을 시켰다.
입원 들어가기 까지도 조금 일이 있었고, 남편이 어떤지 옆에서 보고 싶지만, 그렇게 허용도 되지 않고, 진행 상황은 알 수가 없고.. 여러 걱정이 앞서서 인지 온몸이 긴장을 했었나 보다.
홀로 집에 돌아와서는 손이 달달 떨렸다. 온몸이 긴장 상태로 진정을 못했다. 심장이 부정기적으로 덜커덕덜커덕 뛰기도 했다.
그다음 날도 손이 겉에서 보기에는 떨리지 않지만- 내가 체감하는 나는 손이 떨렸고, 온몸이 긴장 모드였다.
궁금한 게 많았던 관계로 나는 병원에서 JS(진상) 보호자의 엔트리에 진입한 듯했다. 간호사실에 전화해 앞으로의 진행과 상황에 대해 물어봤다 -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궁금한 게 많아서.. 바쁜 간호사들에게는 달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옆에서 챙기지 못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남편은 태어나 처음으로 복수 천자라는 걸 했다. 복수가 기다렸다는 듯 빠져나와 목표량 4L을 1시간이 채 못되어 다 빼냈다.
병원에서 남편 영양상태가 안 좋다고 영양제를 놔주기 시작했다. 펜타닐 패치 용량도 증량했다 한다.
드디어 남편은 조금씩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나의 가정 간호 영역 밖에서 의료진의 전문 간호는 남편의 기초체력을 보강해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 못한 일이 발생했다. 알부민을 몇 시간씩 맞으며 그렇게 뺀 복수가 빠르게 하루 만에 거의 전만큼 다시 찼다.
의료진이 왜 처음에 배액관을 권유했는지 그제야 알게 됐다. 난 복수천자를 하면 적어도 몇 주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삽시간에 다시 차고 있었다. 남편에게 배에 4L의 물을 다시 지고 살라는 건 말하기 가혹한 일인데-
배액관은 관리가 필요하고, 지금 가정 간호하며 지내는 환경도 바꿔야 하고, 남편의 활동에 제약도 있어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지금은 모르겠다.
남편이 죽을 먹기 시작했다. 그것도 다 먹은 적도, 3끼 다 챙겨 먹은 적도, 아직 없지만, 확실히 집보다는 식물을 입에 넣고, 영양제를 맞으니 그래도 다행이다 싶다.
그래도 다리에 근육이 많이 빠져 일어나 자유로운 활보는 어려운 모양이다.
임상 스크리닝 테스트를 통과했지만, 임상 들어가기 전에 컨디션이 나빠지거나, 임상 중간에 컨디션이 나빠지면 임상도 바로 중단되는 모양이었다.
지금 임상을 다음 주에 들어가기 위한 남편의 회복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에 따라 남편의 입원 기간은 다음 주 금요일까지로 우선 연장되었다.
이번 주말에는 좋은 컨디션으로 집에 와서 맛있는 거 먹고, 좋아하는 티비 보고, 좋아하는 집에서 넉넉히 쉬었으면 했는데, 내 마음 같이 상황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남편의 복수 배액관 이야기는 나에게 겁을 주었다. 정말 관을 다는 일은 없기를 바라고 바래었건만, 속이 너무 상했고, 아직도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한 편으로는 이게 나와 남편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인가 싶기는 하다. 속절없이 복수가 차면 천자를 매번 하러 갈 수도 없거니와, 주변 병원은 알부민이 없다니 말이다.
이 와중에 올려진 펜타닐 패치에 남편이 중독이 될까 걱정한다. 사실 지금은 통증을 잘 조절해 사는 게 우선인데,
그냥 마냥.. 남편이 회복돼서 좋아질 거라는 장밋빛 꿈을 꾸며 마약 진통제 때문에 남편이 나중에 힘들까 봐 닥치지 않은 것까지 고민한다.
의료진의 최선을 믿지만, 보호자의 마음 따로, 환자 마음 따로 그렇다.
어제는 잠시 친구를 만나 밥을 먹었다. 근처에 사는 친구에게 잠시 시간을 내어달라 해서 밥을 간단히 먹고 돌아왔다.
사실 만나는 친구도 힘이 들지 모른다. 나는 아직도 이런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내가 이 상황임에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른다.
그런데 친구는 친구라는 이유로- 생활이라고는 남편 암투병에 메여있는 이야기뿐인 내가 밥 먹자는 말에 자신의 일정을 제쳐두고 나와 밥을 사준다.
다행히.. 친구는 적절한 말을 잘 찾고, 잘 들어주는 친구였다. 내 저녁식사 까지 걱정해 여분 밥까지 사서 들려보내주었다. 고마웠다.
밥 먹는 곳이 집 근처라 평소에 남편이 먹고 싶어 하던 식당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남편은 먹지도 못하고 입원해 있는데, 외출을 나온 나 자신이 그냥 남편에게 미안하고. 남편은 지금 먹지 못하는 걸 내가 먹는다는 게 미안했다.
먹다 말고 눈물을 훔치는 나에게 친구가 티슈를 건네준다. "우리 남편 나아서 나랑 같이 먹으러 올 거니까. 나 안 울 거야."
그 아침에 당혹스럽게 나오는 눈물이 사라질 핑계를 내가 만들어본다.
복수, 배액관 등 여러 가지가 겹쳐서 일어나자마자부터 또 울고 있는 나를 만난다. 이럴 때면, 남편이 날 도닥여줬는데..
나는 얼마나 나약한 보호자이며, 나약한 사람인가. 나 자신 하나를 눈물에서 건져 일으켜 세우질 못한다.
연락하면 바로 밥같이 먹고 만나주겠다는 주변 지인들이 있음에도 연락하기가 망설여진다.
지금은 가파른 감정 곡선을 그리는 나 자신을 추슬러 담기가 너무 어렵다. 좀 혼자 서 있을 수 있을 때, 조금은 생각이 정리될 때 만나야겠다 생각해 본다.
아침에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가-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남편에게 온 단백질 보충 음료 미니웰을 빨대를 꽂아 마시기 시작한다.
적막한 집에. 밖에는 환한 낮의 햇빛이 들어오는데. 미니웰을 마시는 빨대에서는 음료가 빨려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눈에서는 눈물이 난다.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며 미니웰을 마시는 내 모습이. 그냥 드라마 한 장면 같았다.
실연당한 사람이 일어나 그래도 살겠다며, 흰쌀밥 한 숟가락 떠먹으며 우는 것 같았다. 그래, 그 마음은 그렇겠지-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뭔가 그리운데 이제는 사라졌고- 찾지 말아야 하고. 그런데 난 지금의 슬픔의 고비를 넘어 씩씩하게 살아가야 할 에너지가 더 필요한 사람이고.
안 넘어가고, 안 내키는 한 숟갈을 계속 떠 넣다 보면, 어디선가 이겨낼 뱃심이 생길지 모른다.
무슨 책을 읽었는데, 거기에 그랬다. 누군가와 사귀는데, 헤어져야 할 것 같은데 미안하다고 못 헤어지는 건- 그 사람과 자신에게 못할 짓이라고.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과 그 사람이 만날 기회를 뺏는 것이라고. 나 자신에게도 행복할 기회를 뺏는 것이라고.
그럼에도 실연은 힘들다. 집착에서, 오롯이 애정을 쏟았던 대상에게서 벗어나는 일은 어렵다. 그건 어쩌면 그 사람에게서 벗어나는 게 힘든 게 아니라 그런 나에게서 벗어나는 게 힘든지도 모르겠다.
인생이라는 망망대해는 너무 넓고 깊고 예측이 되지 않으니, 거기에 있는 나는- 내가 아는 걸,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걸 놓고 가는 게 어려운 것이다.
근데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은 실연과 양상이 조금은 다른 것 같다. 그 사람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서로 사랑하는데도 그 누군가는 돌아오지도 못하고, 소식도 들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난다.
참 슬프게도 병으로 가족을 떠나보낸 사람들이 나에게 말한다. 이 슬픔은 아무리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 슬픔은 가슴에 평생 묻어가야 하나보다.
진정되지 않는 마음과 끊이지 않는 걱정으로 뒤덮인 생각을 털어내 보려고 운동 겸 산책을 나가보았다.
심리적 긴장 때문에 가끔씩 덜커덕 욱신대는 심장의 통증을 부여잡고 한 걸음씩 떼내어 집에서 조금씩 멀리 길을 나섰다.
근데 마음속에서는 주문처럼 늘 하는 그 기도가 나온다.
'제발 살려주세요. 그리고 그냥 살려지는 게 아니라 온전히 한 사람으로서의 인생을 잘 살아가도록 온전히 치유해 주세요.'
계속 계속 그렇게 마음으로 외쳤다. 그냥 반사적으로 그 기도가 나오면서, 세상의 슬픔과 고통에 대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아직 감당이 안돼서 보지 않았는데, 기독교 서적의 유명한 작가인 C.S. 루이스가 쓴 "헤아려 본 슬픔"이라는 책이 있다 한다.
이 작가는 '나니아 연대기'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기독교 인이 아닌 사람도 아는 책을 쓴 작가이다.
이 사람이 결혼 전에 고통에 관한 책을 썼었는데, 그 후 뒤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는데 아내가 결혼 초반에 암에 걸려 죽고, 본인도 그 이후에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아내의 암투병과 죽음을 겪으며 "헤아려 본 슬픔"이라는 책을 썼다는데..
막상 그 책을 보면 그 고통이 절절히 느껴지고, 그 와중에 본인이 가져온 신앙과 지성과의 내적 갈등이 생생히 쓰여 있을 것만 같아서.. 장바구니에 담아만 놓고 구입을 할 수가 없었다.
슬픔을, 고통을 헤아린다-는 제목. 그 표현이.. 이미 내 마음을 아리게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제 친구에게 그랬다. "난 언제쯤 하루에 한 번씩 우는 걸 그만할 수 있게 될까.".. 그리고는 두런두런 이제는 푸바오를 보내야 하는 강철원 사육사님 얘기도 하다가.. 결론은 내가 사춘기도 이긴다는 막강한 갱년기인가 싶기도 했다.
하루하루가 생각해보지 않은 한계에 부딪혀보는 것만 같다. 단단한 돌벽인가. 부드러운 스펀지 벽인가. 그 너머엔 무엇이 있는 걸까.
내 마음의 용량을 벗어난- 이 감정과 생각을 이렇게 쓰다보면.. 나는 내 자신을, 이 상황을 헤아려볼 수 있을까. 헤아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