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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련나무 Jan 28. 2024

40. 희망이 살짝 비칠 때

참으로 지금이 감사하다. 무너지지 않는다.

"한 번은 되는구나"


남편이 이번 임상의 대상자가 되었을 때,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너무 뜻밖의 말이 내 입에서 나와서 내가 한 말임에도 머릿속에 계속 파동을 일으킨다.  


남편의 췌장암 항암 스토리를 다시 정리하자면,


-처음 임상 대상자 실패.

-젬시타빈-아브락산 18회(?-반년도 전이라 이제는 몇 회차 맞았는지도 기억이 가물거린다- 사이클로는 6사이클 이상 한 듯하다) 후 내성 정.

-폴피리녹스 1사이클 후 내성 판정.

-오니바이드 1사이클 후 내성 판정.

-임상 대상자 재 실패.

-그리고 새 임상 대상자 선정됨(현재).


이 항암 경과를 다시 정리하는 이유는- 요새 내가 새 글도 적고, 다른 브런치 작가들의 글을 거의 읽지도 못함에도..


남편과의 항암일지를 전체적으로 읽는 분들이 많다는 걸 통계를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냥 읽고 가더라도 도움이 조금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다시금 적어본다.  


남편은 처음 젬아 할 때가 가장 컨디션이 좋았다. 그때는 외출도 자유롭게 하고, 주사 맞고 하루-이틀 아팠던 것 같다. 구역감 방지를 위해 항암하고 병실에서 나오자마자 맥페란을 먹는 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러나 항암의 누적에 따라 손발 저림이 조금씩 쫓아왔고, 코피도 났다. 그래도 남편이 잘 먹고 몸무게도 좋고, 운동도 가능했었다.


그러나 치료 중, 시어머님께서 갑자기 빠르게 돌아가시고 난 후, 림프 부종이 생기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림프 부종 이후 남편은 젬아에 내성이 생겼고, 림프 부종이 발에 상처도 안 났는데 봉와직염으로 타고 들어왔다. 그래서 그 이후 발톱과 발바닥에 감염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 이후 폴피리녹스도 1사이클, 오니바이드도 1사이클 밖에 써보질 못했다.


NGS유전자 검사를 젬아 내성 생겼을 때, 급히 진행했는데 기존 보유하던 조직 슬라이드가 생각보다 훼손이 많이 돼 검사 의뢰 10일쯤 지났을 때 검사 불가 판정을 받았다.


폴피리녹스를 한 사이클 밖에 못 쓸 줄은 생각도 못해봤다. 피리녹스가 무척 강력한데, 남편이 처음 맞고 아무 부작용이 없어서 이 강력한 항암제를 맞고도 이렇게 멀쩡한 환자는 상위 10%(?)라는 놀라운 얘기도 들었지만..


그 이후 2번째 샷부터는 강력한 구역감이 찾아왔고, 전신에 땀이 나면서 움직이질 못했다. 그래도 그 고통도 보통은 1주일이라던데 남편은 2-3일이면 견뎌내었다.


남편이 폴피리녹스를 맞고는 젬아하고는 부작용의 난이도가 다르다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잘 먹고 잘 지냈다.


그러나 폴피리녹스 후 오니바이드를 못써준다는 의사 선생님 말에 급히 오니바이드를 써주고 다른 약제를 찾아줄 의사 선생님을 찾아야 했다.


4기 암환자의 전원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다행히 전원이 되었지만, 여기서 새롭게 조직검사 & 유전자 검사를 하고, 스텐트 교체에서 예상 밖의 출혈이 나고, 항암을 쉬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좀 긴 금식이 이루어졌고 이 입원 기간 이후 남편은 몸무게가 많이 빠졌다.


오니바이드도 또 1사이클 밖에 써보질 못했다. 그 이후 남은 약은 ts-1인데, 다른 약 한 번이라도 써보려고 임상지원을 했다가 -


결과 발표가 지연되는 바람에 1달 넘게 항암을 못하고 남편은 복막 전이와 함께 복수가 차고 몸무게가 빠지는 상황에 다다랐다.


임상 탈락 결과를 듣던 날, 새 임상 기회와 ts-1 사용, 다른 기존 약제 사용(독성이 심해 현재는 많이 쓰지 않는 항암요법)이라는 3가지 선택지가 있었는데, 남편은 새 임상 기회를 선택했고, 그 임상은 발표가 빠르게 이뤄져 우리는 임상 대상자가 되었다.


여기까지가 편의 항암 스토리이다.


이쯤 읽으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이 들까. 사실 이 일을 겪은 나는 진료실에 들어가기 전이 가장 힘들어졌다.


폴피리녹스 내성 판정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보이는 남편의 컨디션이 좋으니 그냥 진료실에서 듣는 말이 힘들지 않았다.


근데, 내성 판정을 받고, 췌장암 표준 치료제 4개 중, 마지막 치료제로 가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는 진료실에 가서 무슨 안 좋은 얘기를 더 들어야 하나-


마음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진료실 입실 전 그렇게 내 마음을 단속한다. 무슨 얘기를 들어도 무너지지 말자. 무너지지 말자.


오죽하면 나는 카톡 프로필 인사말(?)을 "무너지지 않는다."로 설정했다. 비장하다고 생각은 들지만, 볼 때마다 마음에 또 다짐한다. 무너지지 말자고.


지금 치료 잘 받고 있는 분들은 CT검사 결과 발표를 듣는 날이 그럴 것이다. 찍는 날도 긴장이지만, 검사 결과를 듣는 건 다른 일이다.


늘 긴장의 연속이다. 기대를 가지고 싶은데, 그 기대가, 그 희망이 꺾일까 마음이 걱정을 한다.


임상이 뽑는 인원이 소수이고, 남편이 전이가 많이 된 환자여서 뽑히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담당 의사 선생님이 적극 어필해 주셨고,


그 후에는 제약사의 손으로 갔는데- 정말 많은 분들의 중보기도 덕분인지 어려운 조건임에도 선택이 되었다.


선생님께 감사하다고 폴더 인사를 했다. 약제가 없는데, 하나라도 늘려준 게 너무 감사했다. 이 약제를 1사이클밖에 못쓴다 해도 남편은 ts-1 포함 항암 기간을 못해도 최소 3달 정도는 벌 수 있다.


여태까지 좋은 소식 진료실에서 들어본 적이 없는데, 좋아진 치료의 결과는 아니지만, 그래도 치료의 기회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했고, 그게 선택되는 일이었기에 어려웠는데 그래서 참 좋았다.


그래서인지 진료실을 나온 내 입에서 나온 첫마디가 "한 번은 되는구나"였나 보다.


사실 이 임상도 완벽하지는 않다. 우선 1상이다. 대조군도 없는 1상이다. 이유는 안전성과 앞으로 유효한 약제의 용량을 확인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임상 동의서에 서명하는데 동의서의 시작이 그랬다. 이 환자는 표준치료에서 더 이상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약이 없기 때문에 이 임상을 하는 것을 제안받았다...(원본 그대로의 문장은 아니나...)


우리의 현실이 가장 첫 줄에 써져 있었다. 쓸 약이 없어서, 임상으로라도 약제 하나 더 잡은 우리의 현실이 거기 있었다. 임상을 고를 형편도 못되었다. 2-3상도 아니고 1상인데도 우리는 되면 감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NGS유전자 검사 결과에 대해 설명을 들었을 때는 인체의 불가사의를 느꼈다. 사실 남편의 유전자 검사결과대로라면 남편은 폴피리녹스-오니바이드가 잘 들었어야 맞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브라카 유전변이도 있었는데, 브라카도 애매한 %로 있었고, 이미 우리가 브라카 변이 대상의 임상을 쓸 수 있는 조건을 지나서 써보지도 못했다.


우리가 정체를 알면 뭔가 대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남편의 몸은 알 수 없게 반응하고 있었다.


이미 반년 전에 항암여부 관계없이 기대여명이 2-3개월이었음에도 지금까지 남편은 살아있고, 끝까지 치료받겠다고 자신을 죽을 사람 취급하지 말아달라 한다.  


임상 동의서를 쓰면 쓸수록 만만치가 않았다. 우선 혈액 채취가 너무 많았다. 이것 때문에 임상을 포기한 사람이 있을 정도로 그랬다.


병원을 입원과 외래를 반복해 가야 하는 횟수가 많았다. 기회가 주어졌는데, 수반해서 감당해야 할 일이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언제든 효과가 없으면 임상은 바로 중단된다.  


남편의 복수는 이제 임산부 배 수준이다. 물을 먹는 것도 아파서 생각을 하고 먹는다. 팔다리가 너무 앙상하다.


케모포트를 심은 자리에 케모포트가 새로운 뼈처럼 볼록 솟아올랐다. 24시간 잠을 자고 누워있다. 먹는 건 하루에 200kcal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만났을 때, 결혼했을 때, 아니 불과 반년 전만 해도 남편 모습은 이렇지 않았는데, 새로운 남편을 만나는 것 같다.


요새는 예전 남편과의 사진을 보는 게 참 힘들다. 사진첩의 남편을 다시 만나고 싶은데, 현실이 속절없다.


그래도 분명히 남편이 이 어려운 상황 속에도 단단한 정신력으로 고통을 이렇게 잘 참아내고 있고, 살아있고, 치료 기회의 마지막에 남편이 선택해서 이 어려운 임상의 기회가 생겼으니 참 기뻤다.


얇은 커튼을 살짝 걷어내고 만난 희망이라는 햇빛이 보이는 것만 같다.


남편의 고통을 참아내는 능력은 상상이상이었다. 의사 선생님께 패치를 붙이니 통증이 좀 덜해졌다고 말하는 남편을 옆에 두고, 선생님께 물었다.


"제가 보는 이 사람은 하루에 18시간을 자고, 6시간 눈뜨고 있을 때도 고통을 견디며 뉴케어 하루 2개를 간신히 먹는데, 그게 통증이 덜해지는 게 맞나요?"


그 얘기를 듣자- 선생님이 이건 통증이 전혀 컨트롤되는 게 아니라며, 환자마다 자신의 고통의 역치가 다른데, 고통을 견디는 수준이 다른 분에게 비해 높았다며- 바로 입원장을 신청하셨다.


아마 내가 옆에서 참견하지 않았으면, 남편은 바보같이 선생님과 다른 사람 앞에서는 평상시와 같은 목소리를 내며 말했을 것이다.


집에 있을 때, 남편은 모기 소리로 말하고, 가끔은 기운이 없어 말하기 힘들다고 하는 수준인데, 왜 증상을 호소해야 하는 의료진 앞에서 남편은 자신의 통증이 견딜 수 있다 말하는가..


입원하기 싫어서일까, 수액을 맞으면 복수가 늘을까 봐 일까, 복수 천자가 무서워서일까...


남편의 입원을 앞두고 몇 가지 짐을 싸본다. 내가 같이 들어가지 못하는 병동에 배치될 확률이 높아, 외롭지 않게 해주고 싶은 게 가장 포인트이다.


급하게 핸드폰 자바라 거치대, 헤드셋, 습식 타월(캠핑에서 몸을 못 씻을 때 쓰는 게 많이 나와있다.)을 주문한다. 나머지는 주둥이가 있는 물통, 병원에 도착해서는 생수를 많이 사다놔야한다.


여분 속옷, 간단한 세면도구, 핸드폰 충전기, 병원에서 그냥 걸칠 겉옷과 간단히 이동할 때 필요한 슬리퍼, 혹시라도 병원식을 못 먹으면 그래도 입에 넣으라고 요새 그나마 좀 먹는 밤콩두유와 뉴케어를 챙겨놓아야 한다.


사실 요새는 내가 간호할 수 있는 영역을 지난 걸 내 자신이 느낀다. 남편은 분명 복수를 빼야 뭘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조금씩 펜타닐 패치도 뚫고 나오는 통증은 이제 몰핀 주사가 대체해야 할 것 같다. 영양 수액을 맞더라도 내가 영양수액을 놓아줄 수가 없다.


그저 바라는 건 빨리 입원 병실 자리가 났으면 좋겠고, 적절한 조치를 적극적으로 잘 받아, 좀 더 치료를 잘 받을 수 있는 상태로 빠르게 퇴원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1주일 이상 입원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만약 그 사이 또 스텐트 교체를 한다면, 2주 이상 입원이 될 것이다.


아무랑 말도 할 사람도 없고, 모두 아픈 환자들과 같이 있으며, 자신의 고통과도 싸워야 하는 그 현실은 무엇일까.


그 사이 그렇게 피를 많이 뽑으면 주사 바늘에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괜한 염려들이 벌써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나를 포함해 모든 사람들이 이 상황에 무엇을 해줄 수 없어 무력감을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더 기도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무엇이 최선인지 몰라서 기도하는 게 나에게는 크다. 그리고 지금 가장 나에게 최선은 내가 믿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게 살아있고, 우리에게 주어진 기적의 치료의 길이라면, 나와 남편은 견디며 감사하며 걸어갈 것이다.


희망이 살짝 비쳤을 때, 우리는 그 희망이 보이는 커튼의 끝자락을 붙잡고 밝은 빛을 더 보려 창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참으로 지금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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