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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련나무 May 22. 2024

7. 짧은 일상 이야기

그냥 끄적인 마음 이야기  

작약 얘기가 스멀스멀 들리던 날들에서 조금 더 떨어져서 자줏빛 작약 한송이를 유칼립투스와 함께 들였다.


작약이 집에 올 때는 한 떨기 꽃망울이었는데, 반나절 만에 만개하더니 지금은 올 때의 3배가 되어버렸다. 굳이 묘사하자면- 적양배추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그것도 작약이 피고 지는 모습이려니 싶어 그런대로 놓고 작은 화병의 물을 갈아주며 보고 있다.


보다 보니, 병이 한창 진행 중일 때, 부어있던 남편의 살갗과 장기들이 생각나서 마음이 조금 아프기도 했다. 꽃도 사람도 피해 갈 수 없는 과정이 있나 보다.


남편이 세상을 뜨기 전 날, 남편에게는 생화 내음이 났다. 사람에게서 꽃 냄새가 나다니 너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어쩌면 한 떨기 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럭저럭 반푼이 정도는 되어 - 60% 정도는 회복이 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어느 날, 내 마음을 쏟아내는 환경이 되자, 내 입에서는 내가 생각도 못한 말이 나왔다. '남편이 천국에서 정말 잘 지내나요? 남편이 거기에서 내 생각을 조금은 해줄까요?'


마음 밑바닥에 남편에 대한 보고 싶음을. 남편의 안부를 그렇게 꾹꾹 나도 모르게 눌러 담고 있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남편에게 가는 길은 시간의 길을 가는 길밖에 없다. 나도 끝을 모르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길.


되도록 타인과의 대화에서 남편과의 기억 얘기를 줄이려 노력하고 있다. 과거일 뿐인데, 듣는 타인에게는 뭐라고 받아줘야 할지 모르는 내가 아는 남편의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남편과 함께 했었다면-이라는 이뤄질 수 없는 소원을 말하고 있다.


이야기해서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소원을 이룰 수도, 내 마음이 완전히 후련해지지도. 그런데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당장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줄여나가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도 하지 못한 말은 잠이 들기 전까지 마음에 남아있다. 잠이 깨서도 남아있다. 그렇다.


해안가를 생각했다. 모래사장이 있고, 정박해 놓은 배들이 있다. 파도는 매일 그곳을 들어섰다 나갔다 한다. 그래도 그대로 그 해안가는 남아있다.


기후 이변으로 백 년도 채 못되어 그곳이 바다가 될지라도 해안가는 그냥 들어왔다 나가는 파도를 만나고 또 만난다.


내 일상이 그 해안가 같았다. 남편의 기억이, 남편이 떠남으로 인해 생긴 생각이 파도처럼 나에게 자꾸 왔다가 나갔다가 또 오는데, 그냥 내 일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런 게 삶이었나 싶기도 하다.


되도록 남편과 같이 선택해서 유지하던 것들은 유지하고 싶었는데, 남편이 같이 있어서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 남편이었어서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지만, 나는 남편과 있을 때와 똑같이 유지할 수 없다는 걸 - 줄여나가야 한다는 걸 깨닫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내 단점을 보완해 주고 나를 지지해 주던 사람이 사라지자, 내 삶의 곳곳에서는 나의 단점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내가 말하면, 무던히 내 말을 들어주고 조용히 같이 생각해주던 그 사람이.. 더 그리워졌지만. 그리워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문제 해결의 모든 순간에 나의 부족함이 다 튀어나오면서 스스로 고립되고 싶은 마음의 바램이 생겼다. 그러면 내 부끄러운 모습들이 내 좌충우돌이 덜 보여질 것 같아서 그랬다.


그 와중에 답답함에 새벽에 뛰쳐나가 아무렇게나 달리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숨이 턱끝까지 차고 근육이 움직여지면 뭐라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상충되는 마음속에 나에 대한 자책이 쌓여나갔고,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아무래도 내 마음이 건강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 마음이 건강할 때는 '뭐 어때' 하며 넘어가지고 신경이 쓰이지 않던 일이, 다 나의 무의식에 말을 건다.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복잡함과 우울함과 답답함으로 남아버린다.


6개월 정도가 지나면, 밖에서 우는 일이 줄어들 거라고 의사 선생님이 그랬는데.. 2달을 넘은 지금, 생각보다 제법 눈물 통제를 하고 있다. 이것만 해도 잘한 일이라고 나를 도닥여본다.


높은 파도든 낮은 파도든 그 일렁이는 파도를 맞아내며, 나의 해안선은 그렇게 있다.


얼마 전에도 쓴 "헤아려 본 슬픔"이란 책에 이런 말이 있었다. 공감이 되어 다시 되새김질 하는 마음으로 옮겨놓아본다.


"슬픔은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었다. 그것은 지도가 아닌 역사서를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임로 어느 지점에서 그 역사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영원히 멈출 이유를 찾지 못할 것 같다."

  

"사람들은 말한다. '겁쟁이는 여러 번 죽는다.'. 사랑하는 사람도 여러 번 죽는다.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파먹는 독수리도 끼니때마다 생생한 간을 쪼아 먹지 않았던가?"


이것은, 일상이었다. 나의 모래사장은 그렇게 파도를 맞이하며 그렇게 있다. 저 멀리 창밖의 달이 보름달이 되고 반달이 되고 초승달이 되어가는 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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