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서 장을 보다.
'상실'의 감정을 마주하다.
오래간만에 대형 마트에 장을 보러 갔었다.
우리 집 파란 차를 운전해서 대형 마트 진입로에 들어섰다.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몇 차례의 곡선 구간을 굽이굽이 돌아 드디어 지상 주차장 코너에 들어선다. 사람들은 보통 빠르게 주차하는 5층에 가지만, 우리는 익숙하게 주차할 수 있는 6층을 향해 간다.
카트를 가져오기 용이한 자리에 차를 주차하고, 나중에 물건을 옮겨 담아 올 대형 장바구니를 들고 카트가 있는 곳으로 간다. 카트를 꺼내고 장보기의 메인 코너인 2층을 가기 위해 무빙 워크를 탄다. "내가 밀게" 익숙하게 그는 카트를 가져간다.
장을 보러 가는데 그는 옷을 차려입었다. 베이지색 면바지에 네이비 색 니트티를 입고, 스니커즈를 신었다. 그리고 팔에는 계기판이 큰 시계를 차고 있다. 먼저 무빙 워크에 올라탄 그는 나를 보고 싱긋 웃는다. 나도 웃는다.
드디어 2층 입구에 들어섰다. 늘 그렇듯 과일과 야채 코너가 가장 앞에 보인다. 내 앞에 크게 열린 귤 코너가 보인다. 사과도 있고, 샤인 머스캣도 있다. 오렌지와 귤을 좋아하는 그는 싱싱하고 흠이 없는 예쁜 귤을 골라내겠다며 앞장선다. 한 알 한 알 그렇게 정성스럽게 그는 귤을 골라 큰 비닐봉지에 옮겨 담는다.
나는 늘 그렇듯 두부와 콩나물, 계란 코너로 간다. 그래. 예쁜 과일을 담는 건 늘 그의 몫이었고, 그의 즐거움이었다. 여름이 되면 홀로 계신 어머님이 무거워 못 사러 나가신다며- 수박을 두 덩이씩 고르던 것도 그의 몫이었고, 오렌지를 보면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꿋꿋이 고운 애들만 마음에 들 때까지 골라내던 것도 그의 몫이었다.
과일이 고르기가 끝나면, 나에게 찾아와 캔맥주 코너에 있겠다고 한다. 본인 취향에 맞으면서 가격도 합리적인 그 주간의 맥주를- 퇴근 후의 즐거움을 즐기기 위해- 그는 과일만큼 공들여 맥주를 고른다.
그리고는 빵을 굽는 곳과 초밥과 피자, 간혹 양장피가 있는 그 코너 앞에서 그는 오늘 집에 돌아가서 먹을 음식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다.
오래간만에 대형 마트에 장을 보러 갔었다. 우리 집 파란 차를 끌고 굽이 굽이 주차장을 들어선다. 그 길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몇 가지 사야 할 것만 사서 빨리 나오자고 생각한다.
주차를 하고 카트를 빼낸다. 카트를 밀어주던 그는 사라지고 없다. 그냥 밀 수 있는데, 카트가 무겁게 느껴진다. 2층으로 가는 그 무빙워크 위에서 나는 마음과 시야가 점점 아득해지고 있었다.
2층에 진입 하자, 귤 코너가 크게 서있다. 성큼성큼 귤코너를 향해 가는 그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떠올랐다 사라진다. 귤 코너를 볼 수가 없다. 귤 코너에 갈 수가 없다. 그곳엔 오렌지도 수박도 보이지 않았다.
맥주 코너에 들릴 일은 없다. 맥주 코너에 가던 그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처럼 초밥과 양장피, 피자 앞에 오늘은 뭘 먹으면 좋을까 서성이던 그 모습도 이젠 없다.
신혼부부인 듯 한 사람들이 장을 본다. 뭐가 맛있고 뭐가 좋은지 도란도란 얘기한다. 아이들과 같이 온 사람들도 즐겁게 장을 본다.
우리가 무엇을 먹을 건지, 너의 취향은 무엇이고, 나의 취향은 무엇인지, 언제 어디서 그것을 먹을 건지, 고르면서 서로의 건강을 챙기고, 우리 집 돈 주머니 사정을 같이 공유하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그게 어떤 행복인지. 그들은 알고 있을까.
그와 내가 나누던 그 대화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내가 알고 있던 그의 취향은- 왜 이제 그 어느 곳에서도 공유할 수 없는 걸까. 그의 취향을 나누는 게- 언젠가부터 왜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한 대화의 소재가 된 걸까.
그때, 그와 함께 장을 보던 내가- 나에게는 분에 넘치는 행복이어서, 나의 행복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돼서- 나는 지금 이런 벌을 받고 있는 걸까.
사람들을 보는 게 내 안에 왜 그렇게 상처가 되는 걸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충실히 살고 있을 뿐인데- 왜 나는 마트 속 사람들 사이에서 상처받고 있는 걸까.
왜 나는 아파트 재활용장에서 만나는 남편들의 모습에 상처받는 것일까. 왜 나는 엘리베이터 속에서 만나는 다정한 가족들의 모습에 상처받는 것일까. 왜 나는 놀이터에 뛰노는 아이들에게 상처받는 것일까.
왜 이 세상 그 자체가 나에게 결핍의 슬픔을 느끼게 하는 걸까. 나는 어디까지 비관적이고 비뚤어진 것일까.
마트의 바닥이 나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된 것 같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겁고, 시야가 좁아진다. 숨을 쉬는 폐가 좁아지는 기분이다. 얼굴이 창백해지고, 표정이 굳어서 움직여지지 않는다.
카트를 밀고 나와 산 물건들을 차곡차곡 담아 차 트렁크에 옮겨 싣고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마트를 지나, 저녁의 짙푸른 먹색을 드리운 하늘이 놓여진 도로를 지나간다. 이윽고 눈에 눈물이 어린다. 주르륵 나온 눈물을 옷소매로 스윽- 닦고 운전대를 다시 잡는다.
운전에 집중하자. 다짐한다. 뭐가 그렇게 힘든 걸까. 아마도 귤 코너에서 늘 보던- 잊고 있던 그의 모습이 너무 보고 싶었기 때문일까.
'상실'이라는 감정은 헤어짐의 감정과 다르다. 여태까지 경험해 본 헤어짐의 감촉이 어떨 때는 철근의 차갑고 날카로운 느낌이었고- 어떨 때는 종이에 손을 베이는 것 같은 쓰라림이었고- 어떨 때는 속에서 불이 붙은 것같이 견딜 수 없는 느낌이었다면-
'상실'은 그 어떤 지금까지 경험한 헤어짐의 감촉과 다르다. 이건 나에게는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감촉이었다. 마치 세상에 처음 나타난 새로운 물질을 만지는 기분이다. 더 당황스러운 건 그 새로운 물질이 그냥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또 그냥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설명할 수가 없다. 경험해 본 사람은 그 감촉을 알듯도 한데- 그 생경한 그 감촉을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은 설명할 수가 없다.
빨간 신호등이 켜진 횡단보도 앞에 서있다. 이 횡단보도를 건너면 내가 사는 아파트다. 횡단보도 빨간 신호등에 서있을 때마다 생각한다. 이 횡단보도의 반대편에 그 사람이 서있다면 참 좋겠다고. 초록불이 켜지고 횡단보도를 걷다 보면- 그 생각이 사라지고, 그 반대편에 도착했을 때 그 사람은 거기에 없다.
2024년에는 그 사람이 있었는데, 2025년에는 그 사람이 없다. 그냥 이 세상에서 증발되어 버렸고, 난 묻고 싶은 것, 말하고 싶은 게 쌓여있는 데도 말할 수가 없다.
퀴블러 로스라는 사람에 의하면 상실의 5단계가 있다고 한다. '부정-분노-절망-타협-수용'이라고 한다.
'상실'의 감정에서 이미 수용에 이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보면- 아직 수용에 이르지 못한 나는 내가 너무 못나 보이고, 초라해 보인다. 그런데 내게 수용을 재촉한다면, 나는 화가 난다. 나에게 남편의 죽음에 대한 수용은- 남편이 내 마음에서 사라지는 일 같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그렇다.
나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반년도 지난-지금에서야 "상실"이라는 것을 제대로 마주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 "상실"을 제대로. 진심으로. 마주하고. 상대해야. 내가 누에고치에서 이윽고 날아가는 나비가 될 것 같다.
더 이상 세상 모든 것이 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으려면, 나는 지금 나를 하얀 실 속 포근한 공간 속에 쉬게 해 주고, 나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상실을 마주해야 한다.
마트에서 예쁜 귤을 고르던 그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던 그 순간- 나는 '상실'의 감정을 예고 없이- 마치 큰 파도가 덮치듯-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제대로 마주하게 되었다. 이제 진심으로 '상실'을 대할 때다.
다시 마트에서 즐겁게 장을 보기 위해. 갑자기 마음속에 떠오르는 그의 모습에 무너지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