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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련나무 Dec 13. 2023

37. 고마워요.

당신이 숨 쉬는 모든 시간이 고맙습니다. 더 고맙고 싶습니다.

시간이 빠르게 간다.


마치 겨울 눈밭에 먹을 걸 찾으러 나온 사슴이 포수의 인기척을 느끼고 가녀린 다리로 열심히, 그 크고 애수 어린 눈망울을 하고는, 도망가는 모습이 내가 현재 느끼는 '시간'의 모습이다.


"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장편 소설)"의 프롤로그에서 읽었던 부분이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올랐다.


떠올린 그 때의 이미지로 현재 내가 느끼는 시간에 대한 감각을 묘사할 수 있게 되다니- 참 그 글이 내게 너무 형형했던 것 같다. 소설은 포수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내 마음속에서 그렇게 동그랗게 뜬 사슴의 고운 눈망울은- 아마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눈앞에 보이는 앞만 보며 그렇게 내달렸을 것이다. 포수를 피해, 살길을 찾아서 말이다.


치료약이 없다. 우리가 현재 부딪힌 상황이다. 더한 질병도 있을 테지만, 췌장암은 유독 암이 자신을 보호하는 보호막을 두껍게 가지고 있어 항암제가 잘 투과하지 못한다.


그래서 치료가 어렵고, 임상도 잘 실패한다. 그래서 치료약이 현저히 적다. 그래도 근 몇 년간 췌장암의 치료약은 발전해 왔다. 그렇기에, 좀 더 있으면 분명 탁월한 항암제가 분명히 생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상했었던 일이었지만, 남편의 CT결과는 좋지 못했다. 유전자 검사 결과도 받았는데, 그 결과대로라면 약효가 들었어야 했던 항암제들이 남편에게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이미 있는 전이도 모자라서, 다른 장기 하나로 더 전이가 되고, 기존 암들도 세력을 더 키웠다.


농담할 상황은 아니지만, 남편 몸속의 암세포들은 췌장을 본점으로 남편 몸의 다른 장기에 분점을 성공적으로 내고 있는 듯 보인다. 절망스러웠다.


이제 표준 치료제는 1개 남았다. 그래도 의사 선생님이 임상을 여러모로 알아봐 주고자 노력해 주셨다.


그리고 나쁜 소식이지만, 생각보다 받아들이기 쉽게 톤을 잘 정리해서 얘기해 주셨고, 선생님이 임상이 안되더라도 치료제를 더 강구해 보겠다고 얘기해 주셨다. 그래도 치료의 길을 열어주려고 노력하는 선생님이 고마웠다.


남편은 병원 가기 며칠 전부터 마음속에 힘듦을 추가한다. 항암제 맞으면 힘들걸 아니까, 맞기 싫은 거다. 그래도 맞아야 하는 것도 안다.


마지막 남은 표준 치료제는 경구용 항암제 TS-1이다. 주사 맞기 싫다는 남편에게, 이번에 우리가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나온다면, 그게 우리에게는 희소식일 거라고 현실적인 말을 해줬었다.


효과가 있는데 약을 바꿀 의사는 없으니, 기존 주사를 맞고 나온다면, 남편은 힘들겠지만 그래도 치료의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근데, 우리는 그날 주사도 항암약도- 즉, 아무 항암제도 처방되지 않고 집에 돌아왔다.


진료실을 나와 다음 단계에 대한 안내를 기다리는 데, 진료실 앞에서 남편의 손을 잡고 숨죽여 울었다. 절망적이어서도 아니고, 고통스러워서도 아니었다.


내 눈에 눈물이 그저 난 건- 남편이 그 독한 항암제를 맞고 힘든 것도 모자라 암이 이렇게 자랐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걸 견디고 있어 주는 게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지금 내 옆에 살아있어 줘서 고마웠다. 그게 고마워 눈물이 났다.


얼마 전에 남편에게 말했다. 나는 남편이 살아서 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참 좋은데,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 이게 내 욕심인가 싶다고.


남편이 나에게 말했다. 나도 살고 싶어서 견디는 거니 너의 욕심만은 아니라고. 우리는 둘 다 나눌 수 없는 고통을 지고 같은 욕심을 내어 부리고 있다.


약이 없다. 그 문장이 머릿속을 자꾸 맴돈다. 방법은 보이지 않는데, 시간은 자꾸자꾸 흘러간다.


남편과 손잡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말 한마디 나누는 이 순간이. 안 빼앗기고 싶은데.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은데, 그렇게 쫓기는 사슴 마냥- 시간이- 추운 겨울 들판을 내어 달리고 있다.


임상을 하려면, 임상 대상자가 되는지에 대한 스크리닝 과정이 있고, 통과를 하게 되면, 기존 항암제의 흔적을 지워야 하기 때문에 최소 1달은 항암 공백기가 필요하다.


스크리닝 과정에만 최소 3주가 예정되어, 남편은 약 1달을 항암제 없이 이제 견디어야 한다.


효과가 없는 항암제를 맞고 괴로워하는 것도 문제지만, 치료를 못 받게 된다는 상황도 참 부담이 된다. 항암제를 맞고도 자란 암이, 항암제 없는 세상에서는 어떤 성장 속도를 보일까. 남편은 더 얼마나 고통스러워야 하는 걸까.


결국 우리는 그동안 망설였던 마약 진통제의 용량 상승 처방을 받았다. 그리고 임상을 위한 조직검사 예약 및 몇 가지 서류 절차를 진행하고 병원을 나섰다.


주어지는, 열어지는 치료의 길대로 남편과 나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는 우울한 마음을 달랠 겸, 달달한 음료를 사서 손에 하나씩 쥐고 병원 문을 나섰다.


작년에 갑자기 예고도 없이- 이 맘 때쯤, 암일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 검사를 하러 남편과 입원을 했다.


그리고 또 우리는 예고도 없이 입원 기간이 길어져 병원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남편은 1월 1일까지 홀로 맞이하고 퇴원을 했다.


눈도 쌓이고, 숨을 쉬면 하얀 김이 서리던 그 병원 산책로를 둘이서 꼭 낫자고 다짐하며 얼마나 열심히 돌았는지 모른다. 복도에서도 쉬지 않고 운동을 했다.


그랬던 예고에 없던 된서리를 맞는 듯한- 그 연말연시를 그 병원에서 같이 났다.


1년이 지났다. 남편이- 의사들이 기대여명 1년이라 했는데- 1년을 채우고도 남게 살아있어 주니, 그리고 이 고난 가운데서도 참 참 쓰러지지 않고 마음을 잘 붙잡고 있어 줘서 고맙다.


그저 남편이 건강해져서 예전의 날들을 회복하기를. 그런 기적이 있기를 꼭 바래보는 연말이다.


치료약이 없어도,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옆에 있을요.

고마워요. 내 옆에 있어줘서.

2022년에 이어 2023년에도 있어줘서 고마워요.


고마워요. 그리고 고맙습니다.


쫓기는 시간 속에 남편에게 보내는 내 마음의 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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