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성장 일지 #007
취미생활이 즐겁다. 취미생활을 하면 할수록 거기서 더 잘하고 싶다. 못해도 상관없기 때문이고, 잘하면 잘할수록 좋다. ‘하기만 해도 즐거운 것’을 ‘잘할 수 있다면’ 너무나 행복한 것이다. 0이었던 능력을 1로 만들기만 해도 만족스러운 것인데, 그게 1에서 10까지 올라간다면 얼마나 뿌듯한가.
게다가 N잡시대인 요즘 2번째 +a의 직업을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 당연시되는 분위기다. 직장인들을 위한 교육시장이 활발해진 것, 다양한 스터디가 너무나 당연해진 것도 그 결과일 수 있다. 게다가 다양한 정답이 있는 인생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수준의 영상이 눈앞에 항상 펼쳐진다. 정말 다양한 삶의 모양이 있다는 걸, 독립영화로만 접하던 10년 전과 다른 것은 확실하다. 이젠 블록버스터 주인공도, 독립영화의 주인공도 아닌 사람들의 존재를 더 많이 알고 있다. 평일 오전 드라마의 삶도, 주말 오후 드라마의 삶도 아닌 또 다른 색색깔의 삶이 있다는 걸 알고 난 후, 취미생활을 즐기며 ‘잘하려고 하는 게’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주변에서 많이 보지 못했다.
그렇게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살며, 나의 우선순위에 맞춰 최적화를 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살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내 안에 있는 결핍을 마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충분히 해결하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내게 가장 크게 달려있는 나의 콤플렉스는 제외한 채, 나머지 자잘한 콤플렉스만 처리하려고 노력 중이었던 것이다. 게임 속 왕을 잡으러 가야 하는데, 자꾸만 그 부하들만 처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하들은 ‘왕’ 이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새롭게 탄생한다. 나는 그 ‘콤플렉스 왕’을 처단하지 못하고 ‘콤플렉스 부하’ 들만 해결하고 있던 것이다. 스스로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의 무용함을 직면했다.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본캐가 바로서기 위해서는 ‘콤플렉스 왕’을 잡아야 했다. 가장 크고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있어, 쉽게 처단할 수 없는 그것을 잡아야 했다. 내가 가진 무기로 쳐낸다면 부하들보다 몇 십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 동안, 왕은 계속해서 스스로를 회복할 뿐 아니라, 내게 대미지를 줄 수 있는 어떤 공격을 하기도 할 것이다.
상상해 보자. 왼쪽 끝 화면엔 작은 ‘인간 모양’의 어떤 캐릭터가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오른쪽 끝엔 ‘인간 모양'의 100배는 더 큰, 눈코입을 알아볼 수 없으나 빨간색 ‘HP’ 막대가 엄청 긴 왕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가만히 오른쪽 끝 화면에서 움직이며, 가끔 화살이나 날릴 수 있는 돌멩이들을 던져댄다. 왼쪽 끝 화면에 있는 캐릭터를 조종해 화살과 돌멩이를 피하고, 그에게 근접하여 한 두대를 쳐야 한다. 부하들이 3대로 해결되었다면, 그에겐 30번 이상 접근하여 공격을 해야 한다. 그 공격도 너무 느리지 않게 반복해서 해야만 그 게임을 끝내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본캐에 대한 두려움, 본캐로써 나만의 게임 속 ‘콤플렉스 왕'을 처단하기에 나는 아직도 무섭고 두렵다. 몇 번 살짝 스쳐봤는데 바로 피를 흘리며 죽은 적도 있었다. 몇 번 밖에 죽지 않았는데도 나는 지레 겁먹고 ‘마지막 단계’로 가기를 거부한다. 아니 거부하고 있었다. 무의식 중에는 그걸 거부하고 있었다. 어차피 언젠가 그 왕을 마주할 거니까, 하는 마음으로 계속 그 게임을 끝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본캐가 가져야 할 무기를 하나둘씩 갖는 것을 어려워했었던 것도 있다.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그 무기를 내가 가질 수 있냐고, 자꾸만 남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나도 그 칼을 들고 싸우며 [전사] 타이틀을 가져도 돼?’라는 질문을 한 적도 있다. 그 질문을 할 시간에 ‘전사 타이틀’을 갖기 위한 행동을 했더라면 아마 이보단 조금 더 빠르게 콤플렉스 왕을 처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콤플렉스 부하들을 처단하면서 ‘나의 전사스러움’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어찌 잡은 칼을 휘둘러며, 나름 전사 모양새가 나는 스스로를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그 콤플렉스 왕의 HP를 모두 없앤 다음에야 ‘전사' 타이틀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몰랐다.
그렇게 게임을 해댔으면 서 결국 나의 삶에 단 하나도 적용하지 못했다.
본캐가 되는 것이 두렵다. 본캐가 되어 각종 ‘콤플렉스 왕’을 무찔러야 하는 상황도 마음이 편치 않다. 스스로 경쟁 속에 잘 녹아드는 존재,라고 말하면서도 경쟁을 가장 많이 회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을 몇십 번 글로 써내려 보고 나서야, 그 두려움 앞에 겨우 서있을 수 있을 힘이 생긴 것 같다. 아직도 나는 나의 앞날을 헤쳐 나가는 것에 겁이 난다. 그래도 본캐가 되는 방법 말고는 이 단계를 끝낼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나의 ‘이번 단계 게임을 질질 끌어’ 보았다면 이제는 끝낼 때가 왔다.
두려움을 그대로 내 마음에 간직하고 콤플렉스 ‘왕’ 앞에 한번 바짝 다가가기 위한 ‘칼’ 제련을 시작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