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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게슬기롭다 Jan 18. 2022

주짓수와 머리카락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단편 모음 <헤어짓수>를 보고

주인공은 머리를 자르고 싶지 않았다. 엄마를 따라 미용실에 도착해보니, 머리 잘라줄 미용사는 주인공의 대적으로 느껴졌다. 상상 속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배운 무술로 미용사를 때려눕히고자 하고, 맨 마지막 절호의 발차기를 날린다.

그 순간 현실로 돌아와 의자에 앉혀(!) 지고, 머리를 잘린(!!)다.

자른 모습은 상상과 달리 너무나 귀여웠다.



짧은 이야기 세 개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1. 이건 주짓수야, 태권도야? 


헤어 짓수,라고 하면서 등장하는 주인공의 도복에는 엄연히 주짓수를 떠올릴 수 있는 스펠링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주인공 여자아이는 주짓수와 전혀 관계없는 동작을 한다. 감독은 어릴 적 태권도를 배웠다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동양 무술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어필하고 싶었던 느낌이다. 문제는, 태권도와 주짓수를 구분하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섞어놓았다는 데 있다. 태권도를 8년이나 배웠다면서, 태권도와 그 외의 무술을 구분하지 않고 ‘섞어 놓을’ 생각을 하다니 조금 충격적이다. 주짓수를 4년 간 배우면서, 다른 무술과 어떤 차이점이 있고, 어떤 룰이 허용되고 허용되지 않는지 매번 듣고 배웠던 나의 예전에 떠오른다. 대회를 나가기 전 항상 주짓수 룰을 숙지해야 했고, 득점과 실점, 어드밴티지와 페널티에 대해 꼭 알고 있어야 했다. 다른 선수들의 영상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룰에 대한 배경 지식을 갖고 볼 때, 시합 영상은 5배~10배 이상 재미있었다. 나와 비슷한 체급의 선수들이 다른 대회에서 사용하는 기술들을 보고 연구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런 엄청난 매력을 가진 주짓수를, 태권도와 애매하게 섞다니. 이건 태권도와 주짓수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불편감을 주는 세팅이라 조금 아쉽다.



2. 관리되지 않는 헤어스타일 


고등학생 시절부터 나의 별명은 해그리드였다. 중학생 때는 머리를 짧게 잘랐어야 했고, 고등학생 들어 ‘길이는 상관이 없다’라는 규칙에 따라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아주 좋은 복, 엄청난 모량과 굵은 모발 두께를 DNA로 갖고 있었다. 엄마 아버지의 콜라보 덕분에, 머리카락 걱정은 하지 않고 지내고 있다. 약간의 컬이 있다는 게 조금 문제였다. 주기적으로 매직을 하지 않으면, 나의 머리는 컨트롤이 불가능했다. 아침에 등교하면서 말리지 못한 머리가, 점심~저녁때 전부 다 말라 있을 때, 그 변화는 ‘머리카락이 자라났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가끔 머리카락 길이 검사 때문에 학생주임 선생님이 반에 들어와 체크를 할 때 꼭 내 머리를 보고 한 마디씩 했다. 저 아이가 다 묶은 머리보다, 너의 반 묶음이 훨씬 두껍다나 뭐라나.     어릴 적 심심할 때 가끔 하던 ‘머리카락 싸움 - 머리카락을 임의로 뽑아 서로의 머리카락을 교차하여 더 먼저 끊어지면 지는 게임’을 했다. 대부분의 경우 내가 이겼다. 친구는 심사숙고해서 하나 골라냈고, 나는 아무런 머리카락이나 잡아 뽑아도 내가 이겼다. 내 머리카락 한 올로 몇 명의 친구와 대결을 펼쳤는지 모른다. 쉽게 승패가 결정되는 싸움이라 몇 번 하고 금방 흥미를 잃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머리 스타일은 여전하다. 쇼트커트를 하고 나서 붕붕 뜨는 머리카락을 주체하지 못해, 한동안 헤어 픽서까지 사용했다. 린스와 트리트먼트는 필수고, 헤어 오일이나 헤어 미스트도 들고 다니면서 ‘살아나는 내 머리’들의 숨을 죽여야 했다. 요새는 28번, 2달의 챌린지를 진행 중이다. 2일에 한 번씩 좋다는 헤어트리트먼트를 바르고 기다린다. 그러고 나서 자기 직전에 씻어낸다. 과연 꾸준한 관리는 얼마나 ‘관리되는 것처럼 보일까.



3. 주짓수와 머리카락


그래서 내 머리카락은 주짓수 도장에서 참 많이도 빠졌다. 바닥에 깔린 채로 이스케이프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내 등 아래에 머리카락이 깔려 있는 상태로 탈출을 시도하다 나의 머리카락을 스스로 뜯은 적도 있었다. 아프긴 했지만 아깝진 않았다. 어차피 머리카락 많은데 이 정도야 뭐, 하고 쿨하게 넘어간 적도 있었다. 짧은 헤어스타일을 가진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주는 마찰력이 적어서 이스케이프를 잘하는 경우도 종종 보았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괜히 내 탈출 실력이 '머리카락의 마찰력' 때문에 방해받는 것 같다고 느껴, 머리를 자르고 싶었다. 핑계였다. 


일본에서 진행하는 대회를 나간 적이 있는데, 마침 상대 선수는 아람 에미리트 출신이었다. 그 나라 출신 선수들은 주짓수 대회에도 히잡을 쓰고 나왔다. 대부분 머리카락을 땋거나 질끈 묶고 나오는 다른 선수들과 또 달랐다. 머리카락을 숨기기 위해 걸친 히잡이 쵸크 시도하는 손동작 때문에 벗겨졌다. 그때마다 심판은 STOP을 외쳤고 상대가 히잡을 제대로 쓸 때까지 시합은 멈춰졌다. 다시 시작. 그리고 또 쵸크 시도. 내가 연습해간 쵸크는 바짝 상대방 목에 붙여 넥타이를 하듯 하는 것이라 그런지, 몇 번이고 히잡이 벗겨졌다. 그렇게 몇 번 상대방 머리에서 히잡을 (의도치 않게) 벗겨내다가 페널티를 받았다. 

시합이 끝나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여성 인권을 위해 주짓수를 시킬 때가 아니라 저 히잡을 벗겨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렇지만 그 나라의 일이니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저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게 웃겼다. 조금 씁쓸했고, 그 옅은 씁쓸함이 진한 기억을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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