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넷, 유럽 돌바닥에서의 기록 7

일곱 번째 기록- 드디어 날 반겨주는, 포르토

by 릴리코이

어젠 비가 홍수처럼 와서 내 에어비앤비가 곧 떠내려갈 것 마냥 쏟아부었다. 리스본에서 괜히 떠나왔다는 생각들, 우울하고 심지어는 화까지 났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비바람을 맞고 있어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내 방 포근한 이불속에 박혀서 어제 사온 과자와 유럽버전 비요뜨를 먹으며, 내가 좋아하는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을 보고, 보고 싶은 유튜브를 전부 다 보고, 푹 자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 일어나서 할머니와의 모닝 통화, 창문을 비춰 방바닥에 슬며시 자리 잡은 햇살이 내게 위로가, 위안이다.

온 몸을 전부 다 펼치고 늘어져도 넓디 넓은,

한 시간 동안 정성스레 화장을 하고 나와 포르토의 가장 유명한 볼량 시장에 들러보려고 찾는데, 웬걸 지도를 보면서 뱅뱅뱅 돌아도 볼량 시장이 없다.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볼량 시장이 하늘로 솟은 건지 정말로 없다. 한참 그 주변을 돌다 영어가 아닌 글씨로 하늘색 표지판에 쓰인 것을 유추해보니 공사 중인 것 같았다. 허탈하긴 했지만 괜찮아, 하늘이 예쁘니까! 하늘은 맑은데 비가 오다가 갑자기 햇살이 내리쬔다. 오늘 청색 빵모자를 썼는데 굿초이스였군. 유럽에선 모자를 쓴 사람을 굉장히 많이 볼 수 있다. 귀찮게 우산을 들고 다니고 싶지 않아 하는 나 같은 사람에겐 참 편리한 모자 녀석.

알록달록 평화로운 이곳

점심을 먹으러 BRASAO라는 레스토랑에 왔다. 혼자인 내게 친절하고, 오래된 통나무집에서 식사를 하는 것처럼 분위기도 좋고, 무엇보다도 너무 배가 고파서 절대 돈 주고 사 먹지 않던 식전 빵을 먹었는데.... 와우 맛있다! 버터는 언제나 옳고! 버터에는 특이하게 베이컨이 콕콕 박혀있다. 오늘도 천천히 음식을 음미하고 음식에게 집중하며 식사하고 싶다. 아 맞다. 새로운 깨달음인데, 여긴 사이다보다 맥주가 싸다. 이제껏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세븐업(사이다) 플리즈." 했었는데 맥주가 더 싸네.. 왠지 사기당한 기분. 슈퍼북은 포르토 맥주인데 딱 내 입맛. 가볍고, 상큼하고, 시원하다. 한 모금으로 얼굴이 빨개지는 나. 촌스럽게 안 빨개지도록 천천히 먹어야지. 얼른 프란세지냐야 얼른 나와라 언니 배고프다.

보기만 해도 배부른 예쁜 사진

포르토의 전통가정식이라는 프란 세지냐. 치즈, 햄, 빵, 계란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음식이다. 소스가 토마토 베이스라 다행히 느끼하진 않지만 살짝 짜고 반밖에 안 먹었는데도 배부르다. 감자튀김과 빵을 남길 것만 같지만, 천천히 다 먹도록 해봐야지. 음, 지내오면서 느낀 건데 생각보다 그렇게 엄청 맛있는 음식은 없다. 유럽은 유럽. 눈 돌아가게 맛있는 것은 빵. 디저트. 어제는 2인분을 먹어도 멀쩡했는데 이 음식이 확실히 열량이 높기는 한가봐. 배불러!


여느 때처럼 오늘도 아무 계획이 없다. 날씨가 예쁘니 동루이스강에 가볼까 생각 중. 거긴 앉을 수 있는 공원이 있을까? 유럽에 도착해서 아무 공원이나 앉아 가사를 쓰고 싶던 꿈이 있었다. 나는 유럽에 여행을 왔다기보다는 살러왔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그냥저냥, 살고 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인생 샷을 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거기 사는 사람들과 같이 요리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잔다. 한국이나 유럽이나 나 혼자, 외로이 지내는 것은 똑같다는 생각.

진심으로 명화를 보는 것 같았던 포르토 풍경

그림이다. 그림을 보는 것 같다. 건물, 강, 햇살의 색감 전부가 실제를 보는 것 같지 않다. 바람이 코끝에 닿는다. 그저 몸으로 느끼고 싶다. 지금을.


걷고 또 걷다 보니 골목골목 와인 상점이 있어 구경하고, 곤돌라가 있어 타러 갔더니 그 큰 곤돌라에 나 혼자 태워주셨다. 내심 새로운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새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 공간을 내게 온전히 내어주셨다.. 하하. 쪼끔은 무섭긴 했지만..차분히 그 때의 하늘, 건물, 사람들, 그리고 나를, 보고 느낀다.

30초 전에 비가 오다 이렇게나 맑은, 포르토의 기분이란

집으로 돌아와 한 두 시간가량 내 방문을 못 열어 거실에 갇혔다(?). 유럽 와서 문 때문에 고생한 게 넘버원.. 오늘 아침에는 화장실에 갔다가 문이 안 열려 문 앞에서 씨름을 하고 있는데, 옆방에 외국 커플이 내방 문과 함께 씨름을 해줬었다. ㅎ ㅏ.. 유럽은 정말 오래된 집과 공존하는 동시에 한창 공사 중인 것 같다. 아마도 내가 40대가 되어 다시 오면 더 많이 바뀌고 편리해져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난 마녀가 쓸 것만 같은 커다란 열쇠도, 이렇게 가끔 열리지 않는 내 방문도 괜찮으니 이대로 남아있어 줬으면.


아까 먹은 프란세지냐가 너무 배불러 하루 종일 굶겠다는 다짐을 한 지 3시간이 지난 지금, 내일 아침밥으로 산 에끌레어를 지금 먹어야겠다. 100년 된 제과점이라는데 과연 맛이 어떨지.. 두근두근두근.

가끔은 초코도 감을 잃을 때가 있지

에끌레어는 그냥 슈. 다크 초코보다 블루베리 잼이 더 맛있다. 블루베리 에끌레어 속엔 생크림이, 초코 에끌레어 속엔 슈크림이. 언제나 초코가 옳은 건 아니야.. 유럽에서 100년 된 000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달았다. 스페인에는 더 더 오래된 빵집이 있단다. 뭐, 경험이지! 이 에끌레어는 별로인 걸로!


포르토의 에어비앤비는 세 팀이 한 거실을 쓰는 집인데, 오늘은 이 큰집을 나 혼자 쓴다. 오늘은 아주 편안하게 하루를 보내는구나. 다만 오늘 갑자기 내가 한국에서 예약한 다음 목적지 바르셀로나의 에어비앤비 호스트 나초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예약이 취소되고 새로운 집을 예약하는 것에 맘이 급했다. 다행히 저렴한 가격의 집을 잘 구했지만 여전히 배드 버그(유럽에 퍼져있는 피 빨아먹는 진드기)는 공포스럽다. 포르투갈의 숙소 2개 전부 워낙 깨끗해서 전혀 생각이 안 났다. 소매치기도! 핸드폰에 끼웠던 소매치기 방지 팔찌도 빼버렸다.


포르투갈은 여행자의 나라인 것 같다. 리스본은 5분의 3이 여행객처럼 보였고, 그로 인해 도시가 조금 지저분한 것 같기도 하다. 골목골목이 워낙 좁고, 사람은 많고, 여러 인종이 뒤섞여있다. 그에 반해 포르토는 한국으로 치면 분당 같다. 깨끗한 거리, 여행객과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비슷하고, 백인의 비율이 더 많은 듯하다. 이제껏 치근덕거리는 패거리도 딱 1팀(이 팀도 나에게 HELLO~ 한 것일 뿐 리스본에 비하면 아주 귀여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아무튼 그래도 난 리스본이 더 좋아. 포르토는 너무 여유롭고 평화로워 나에게 조금은 심심한 도시. 길거리공연도 많이 없구..신트라, 무어 성이 그립다. 호카곶도. 이렇게 포르투갈에서 일주일 로컬 삶을 살았으니, 곧 떠날 스페인에서는 계획을 잘 세워 관광객 모드로 ‘여행’이란 것을 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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