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기록- 아, 몬세라트
어젠, 바르셀로나에서 꼭 가야 한다는 구엘저택, 또 꼭 가야 한다는 레이알 광장에 갔다 왔다. 행복에 겨운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나는 생각했다.
이곳은 혼자 올 곳이 아니야..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다.
스페인에서 특히 글을 덜 쓴 것은 포르투갈보다 덜 아름답다는 이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단 이유, 한국말로 한국 친구에게 내가 느끼고 본 것에 대해 다 털어놓을 수 있었다는 이유.. 그래, 더 이상 나 자신과 대화할 필요가 없어져서의 이유에서였다. 나 자신에게 내가 서운하다.
미워, 너. 나.
지금 글을 쓰는 이 곳은 몬세라트 산악열차를 타고 올라온 봉우리 중 하나. 6만여 개의 봉우리 중 한 개를 내가 빌렸다. 곁에는 귀여운 도토리가 주렁주렁 열려있고, 햇살은 따사로우며, 바람은 시원하고, 하늘은 바다처럼 푸르며, 공기의 흐름은 평화롭다. 뭐든지 자극적인 것은 없고, 은은하고, 청량하다. 모든 생명체들은 평화롭고 차분하고, 나 또한 그렇다.
몬세라트 산 아래 아이들의 합창을 보러 많이들 오기 때문에 미사 시간이 되자 많은 사람들은 황급히 하산했다. 하지만, 나는 가지 않고, 혼자 이 곳에 남았다. 나는 자연이 좋아. 아마 이대로 내려갔으면 무지 아쉬웠을 거야. 이 공기, 기운, 바람, 색, 온도, 질감을 다 느끼자.
이상하게, 마약을 한 것처럼 뛰어내리고 싶다. 산이랑 하늘, 옅게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일원이 되고 싶다. 햇살이 따사로워 피부 겉이 다 탈 것 같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를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가 파도소리 같다.
나는 내가 산보다 바다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 지금껏. 하지만 이 순간 나는 내가 산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온화한 산이 좋다. 내가 어떤 잘못을 해도 날 받아줄 것만 같아, 희미한 미소로 내 등을 살살 쓸어줄 것만 같다.
이 공간에는 나라는 작은 먼지만 존재한다. 내 옆에 있는 도토리나무 대롱대롱 매달린 도토리를 본다. 도토리는 맨들맨들. 아주 기분 좋게. 그러다 작은 돌 하나를 봉우리 끝 낭떠러지로 힘껏 던져본다.
틱.
내 눈앞에서 떨어진다. 고작.
이 커다란 세상에 작은 돌 하나 던진다고 해서 세상이 변하진 않는다.
그냥 틱, 그저 틱, 하고 내 눈앞에 떨어질 뿐.
내게 아무리 커다란 시련이 와도 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그건 그냥 내 눈앞에 툭 떨어질 뿐이야.
그러니까, 나는 내 세상을 아마도 잘 살아낼 것이다.
잘 이겨나갈 것이고, 해낼 것이고, 지켜낼 것이다.
살면서 이런 하늘색은 본 적이 없다. 산봉우리 위로 저어기 멀리에 있는 하늘과 세상의 경계선. 그곳은 하얀 물감을 잔뜩 먹인 하늘색. 고개를 들수록 색이 진해지는데 그마저도 새하얀 파란색이다. 내가 구름보다도 위에 있는 것 같다.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 싶은데, 비염 때문에 코가 막혀 답답.
이곳에 살고 싶다. 이곳에서 그냥. 아무 생각도, 걱정도, 필요치 않은 곳.
그런데 문득, 한국이 그리웁다. 복잡하지만 내가 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버스, 지하철 길, 복작복작한 마트, 서점, 옷가게, 내가 곧 가르칠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산 봉우리에 앉아서 그저 바람, 공기, 햇살 속에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노트에 글을 쓰고 있던 중, 어떤 할아버지가 내 앞에서 기웃기웃. 그러다 나에게 영어가 아닌 어떤 언어로 수줍게 말을 건네시는데 사진을 찍어달라는 줄 알고 오케이 했지만, 그게 아니라 본인께서 나를 찍어도 되겠냐는 말이었다. 사진 찍히는 걸 워낙 싫어하는 나는 한국 같았다면 절대 싫다 했겠지만, 어쩐 일인지 흔쾌히 좋다 했다. 할아버지는 마치 유명 포토그래퍼가 된 것처럼 이리저리 움직이시며 사진을 찍고, 내게 보여주며 아름답다고, 예쁘다고, 소년처럼 웃음을 지으신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안젤 할아버지. 까탈란 민족 할아버지라고. 나는 영어, 할아버지는 까탈란 언어. 우리는 전혀 다른 언어로 대화를 나눴는데, 정말 겹치는 단어가 하나도 없어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대화가 가능했다.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시는 것 같아 "아임 주디!" 했더니, 까탈란에도 여자 이름으로 주디트라는 이름이 있다고 하신다. 내 손에 기꺼이 키스를 해주시고 바이 바이. 신기하다. 아름답기까지 하다. 이 광경이.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데 몇십 분이고 앉아서 대화가 가능하구나.
기꺼이 할아버지의 사진첩에 찍히는 걸 허락하길, 참 잘했다.
자꾸만 웃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