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선생님은 어디쯤 있으신 거에요?
"제가 말이죠. 제자 훈련을 하면서 삶의 우선순위 바꾸기를 했단 말이에요?"
"네."
"그런데 말이죠. 제가 돈과 일을 1순위로 뒀더라구요? 와, 얼마나 추악하던지."
"네."
"그래서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었어요! 온갖 과정을 다 겪고서 나는 드디어 하나님을 1순위에 두었답니다!"
"..."
"그래서 조금은 삶이 편안해 진 것 같기도 해요."
"...
그런데요, 선생님. 선생님은 그 우선순위에서 본인 자신을 어디에 두셨어요?"
"저요?..."
"네. 선생님은 삶의 우선순위에 어디에 두셨는지 궁금해서요."
"어? 어떡하지. 삶의 우선순위 지난번이나 이번에나 내가 없어요..."
지난 날 내가 겪어온 시련을 무용담처럼 신이 나서 우쭐대며 이야기 하다
눈물이 툭 하고 터져 버렸다.
어, 내가 없다.
어랏, 진짜 내가 없네.
"제가 없어요... 어떡해...나 뭐 한거지..."
"선생님. 선생님 정말 이타적이고 사랑 넘치시고 너무 귀한 분이세요.
그런데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것에 조금 더 관심 가지시고
선생님이 행복한 일, 선생님이 즐거우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사는 작은 동네에
세상의 최 정점의 지식인의 자리에서
자발적으로 고요한 시골 동네에 들어와 서가를 꾸리는 부부 내외가 계신다.
알고 지낸지 5년 차,
수업이 없는 날이면 가서 미주알 고주알 속 얘기 다 하고
영혼의 민낯까지 보여주며 위안을 받는 곳에서
오늘 바깥지기 분께서 따스히 말을 건네 주신다.
인스타를 통해
내가 살아온 모든 일상을 보셨단다.
아이들에게 퍼 주는 사랑,
보육원 아이들에게 해 주는 후원,
참으로 귀하고 아름답지만
선생님 자신을 위해서 조금 더 충만해 지시면 좋겠다는 진심어린 위로에
나는 왜 이리 항상 내가 없을까,
가을볕을 맞으며
조용한 한옥의 서가에서
생각에 잠겨 본다.
브런치에서 항상 나의 존재에 대해
귀한 응원을 보내주시는 몇몇 분들의 댓글도 그렇고
나는 왜 나의 존재자체를 수치심으로 인식하고 있는 걸까.
그래서 과외 아이들과
내가 낳은 두 아이들의 자존감 만큼은
수치심이 아니기를 바라며
나를 버려가면서 그토록 신경을 쓰는 걸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더 나누고
흙길을 터덜 터덜 걸어
주차장으로 걸어와 인사를 한다.
곱게 묶은 머리를 한
바깥 지기 분께서
두 손을 고이 모아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오래도록 건네신다.
나의 영혼에 대한
깊은 응원이겠지.
나도 덩달아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한다.
가을 낙엽이 붉게 물든 그 시골길을
조용히 운전해 나오면서 생각해 본다.
나의 영혼을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꽤나 많구나.
태어날 적엔 환영받지 못했던 영혼이
마흔을 바라보는 이 순간,
여러 귀한 사람들이 내게 따스히 일어서라 손을 내미는 구나.
그렇다면
나는 그분들의 바램대로
한 발짝 떼어 봐야겠지.
나의 존재에 대한 응원을,
가까이서 응원의 소리를 내는 분들의 외침에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지.
어린시절
한발 한발 걸음마를 배울 때
저 멀리 온전했던 생모의 응원을 듣고
발을 뗄 수 있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