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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경아 Nov 06. 2019

따뜻한 말 한마디, 작은 용기, 햇살 한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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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해 전, 여름이 끝나가던 9월의 하루였다. 나는 제주 대평리 게스트하우스에서 며칠 째 홀로 머무르고 있었다. 배낭 하나 메고 떠난 가벼운 여행이었다. 바다를 보며 발 닿는 대로 걸었고 대평리까지 왔다.


비수기의 마을은 한산했다. 박수기정이 바로 옆에 있었지만 관광객은 없었고 그런 한적함이 마음에 들었다. 아침이면 조용한 마을에 파도와 새들만 사는 듯했다. 천천히 일어나 해변을 산책하고 방파제에 앉아 파도가 들이치고 밀려가는 것을 보았다. 가끔은 동네 강아지와 놀기도 했고 어두워지면 책을 읽었다.


게하에는 나처럼 혼자 여행을 온 두 명의 숙박객이 있었다. 아침마다 낚싯대를 들고 바다로 가는 키 큰 청년. 정원에서 책을 읽는 짧은 머리의 여자. 조용히 각자의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우리는 우연찮게 같이 부엌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게 되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어색한 인사를 하고 머무적거리는데 게하 주인이 다가와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근처에 멋진 계곡이 있는데 셋이 같이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짧은 정적이 흘렀지만 우린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낯선 세 사람이 낯선 곳으로 함께 소풍을 가게 되었다.


이름도 나이도 몰랐지만 여정은 편안하고 즐거웠다. 계곡 또한 게하 주인이 추천할 만큼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곳이었다. 두 개의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너른 바위들이 있었고 맑은 물이 싱그러운 소리를 내며 흘렀다. 길고 선명한 햇살이 키 큰 나무들 사이로 뻗어 나와 우리를 비췄다.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내 안의 문을 열고 그 안에 쌓인 것들을 훌훌 털어내고 싶은 날.


조용히 풍경을 보던 여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제가 최근에 정리해고를 당했거든요..." 그녀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결혼도 안하고 25년을 일만 했는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당장 다음 주부터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그녀는 퓨즈가 나간 것처럼 삶의 어느 지점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급격히 몰려오는 무력감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다가 최근에야 마음을 추스르고 오랜 소원이었던 여행을 시작했다. "진작 갈걸 그랬어요..." 그녀는 한 달간 유럽 곳곳을 돌고 제주도로 왔다.


이야기를 듣던 청년이 말을 이었다. 그는 회사 동료와 진지한 연애 끝에 최근 헤어졌다. 그녀는 헤어지자마자 바로 맞선을 보고는 얼마 안 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작은 회사의 비정규직이었던 그는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 청년은 휴가를 내고 제주도로 와 낚시를 했다. 깊고 너른 바다에 그의 상실을 흘려보내며 시간을 낚는 일. 그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청년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곧 나의 이야기였다. 나 또한 오랜 연인과 헤어지고 어쩌면 평생 혼자일 수 있겠다고,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결심을 한 뒤였다. 회사는 이직이 아닌 영구적 퇴사를 고민하고 있었다. 다른 계획은 없었다. 친구들은 결혼을 했고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으며 자신들이 세운 계획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대로를 벗어나 이정표 없는 샛길에 홀로 들어섰다.


우리는 평평하고 너른 바위 위에 앉아 대화를 이었다. 이야기는 편안했고 듣는 이는 우리 셋과 햇살과 바람뿐이었다. 오후 내내 이런저런 말들을 나누고 간식으로 가져간 빵을 먹고 텀블러에 담아 간 커피를 마셨다. 돌아올 때즈음, 세 사람의 표정은 훨씬 가벼워졌다.


삶에 시련이 닥치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기쁨이 따라야 슬픔이 희석되는 걸까, 궁금했었다.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따뜻한 말 한마디, 작은 용기, 햇살 한 줌으로도 때로는 간극이 메워졌다. 우연히 마주친 하루의 다정한 위로로 때로는 충분했다.


대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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