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자정이 넘어 퇴근하던 밤, 지친 몸을 끌고 집으로 오면 씻지도 못한 채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지곤 했다. 거대한 기계처럼 쉼 없이 돌아가는 회사는 축축하고 무거운 유령처럼 나를 짓눌렀다. 애를 쓰면 쓸수록 가라앉는 늪. 나는 끝없는 바닥으로 침잠하고 있었다. 일상을 돌볼 힘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무력감, 우울감. 여러 이름의 유령들이 불쾌하고 끈적한 액체처럼 내 안 깊은 곳까지 들러붙어 어딜 가든 기어코 쫓아왔다.
강남 빌딩 숲 사이 오래되고 작은 빌라에는 나처럼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돈이든, 시간이든, 타인의 기대든, 무엇이든, 그들은 무언가에 쫓겼다. 어쩌다 침대에 쓰러지지 않고 깨어있는 날이면 기척 없는 밤의 적막에 싸여 이런저런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답은 없었다.
11월, 겨울이 시작되던 밤이었다. 힘없이 기대앉은 벽 너머로 처음 듣는 나지막한 기타 선율이 들려왔다. 어둠을 뚫고 들릴 듯 말 듯 조심스레 이어지는 부드러운 선율.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라는 곡이었다.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을, 힘든 사람은 힘든 사람을 쉬이 알아본다. 본 적 없는 이웃의 기타 소리에 맞춰 나도 모르게 허밍을 했다. 그는 기타를 치고 나는 멜로디를 따라가며 하나 둘 마음속 꺼진 전등을 켰다.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밤이 되어 사위가 어두워지고 혼자인 시간이 되면 낮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는다. 자신을 풀어주고 쉴 시간이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면을 벗지 않은 채 시간을 보냈다. 초라함, 수치심, 좌절감, 불안감. 그런 것들로 점철된 자신을 차마 마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게는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그날 밤의 선율은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에요. 저도 그래요. 우리 모두 그런 걸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선율은 달빛을 타고 내게 빛을 드리웠다. 웅크리고 숨은 어둠 속의 아이를 다정하게 안아주듯이. 가슴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솟았다. 응어리가 터지듯 두 뺨으로 가슴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밤, 그 하루는 알았을까. 우리는 이렇게 한 걸음씩 살아간다는 걸. 그래도 괜찮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