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한껏 기승을 부리던 팔월의 점심시간이었다. 회사 동료들에게는 약속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혼자 근처의 놀이터로 갔다. 여름의 놀이터는 숨 막히는 더위 때문에 한산할 때가 많다. 하지만 내게는 방해받고 싶지 않을 때 가는 소중한 은신처였다. 아무도 없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지나가는 사람이나 산책 나온 강아지를 구경했다.
나는 회사 생활 때문에 많이 지쳐 있었다. 아무리 야근을 해도 끝없이 쌓이는 일들은 목 좁은 터틀넥을 입은 듯 숨통을 조여왔고 조직 중심의 딱딱하고 보수적인 문화도 나와 맞지 않았다. 관둘까 말까, 관두면 뭘 할까, 내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까. 마구잡이로 솟아오르는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도 찾지 못한 채 여름이 지나고 있었다.
그 와중에 그녀를 보았다.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젊은 환경미화원이었다. 어깨까지 오는 검고 단정한 머리를 가지런히 묶고 꼼꼼하고 빠른 속도로 길가 모퉁이에 쌓인 쓰레기를 빗자루로 쓸고 있었다. 여름 쓰레기는 조금만 방치해도 벌레와 악취가 진동을 하고 썩은 음식물이 섞여 있기라도 하면 아무리 비위가 강한 사람이라도 견디기 힘든 냄새를 풍겼다. 누군가 토해낸 토사물처럼 한여름 길가에 방치된 쓰레기에서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악취가 흘러나왔다. 지나는 사람 모두 코를 막고 얼굴을 찌푸렸고 멀리 떨어져 있던 나도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였다. 마치 썩은 생선 더미 같은 냄새. 왜였을까. 나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로 시선이 갔다. 얼마나 괴로울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별다른 표정 없이 아무렇게 쏟아져 나온 세상의 내장 더미를 묵묵히 치우고 있었다.
침착한 그 모습은 불쾌한 얼굴로 허겁지겁 달아나는 사람들과 대비되어 왠지 눈에 띄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모습에 경외심을 느꼈다. 짜증이나 조급함이 없는 꼿꼿한 자세. 불쾌한 상황, 다른 이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에도 그녀의 빗질엔 흔들림이 없었다.
함부로 던져진 쓰레기 사이에 홀로 선 그녀를 보며 나는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각자의 생을 살아내고 있다는 묘한 동질감도 느꼈다. 있어야 할 곳에 담담히 서서 마주해야 할 것들을 마주하는 그녀의 모습은 진정한 용기였고 강함이었다.
언젠가 을지로에서 보았던 출근길 풍경이 떠올랐다. 신호등이 붉은색으로 바뀌고 내가 탄 버스 옆으로 오래된 짐 오토바이가 멈춰 섰을 때였다. 이삼십 년은 된 듯한 낡은 오토바이 몸통 위로 찌그러진 헬멧을 쓴 육십 대 정도의 사내가 보였다. 손 때가 묻어 반질한 고무 손잡이는 여기저기 뭉개지고 찢겨 그간의 험한 세월을 말해주는 듯했다. 뒷좌석에는 몇 번을 매만져 묶은 듯 팽팽하게 날이 선 회색 로프가 사내의 앉은키보다 더 높이 쌓아 올린 짐들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다. 그때 계기판 아래 붙은 작은 사진이 눈에 띄었다. 손녀로 추정되는 서너 살 정도의 여자아이가 뿌루퉁하게 입을 내민 귀여운 사진이었다. 짧은 신호대기 동안 늙은 라이더는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왠지 상상되는 듯했다. 신호가 바뀌자 라이더는 다시 앞을 보고 오토바이는 부르릉-컥컥하면서 힘차게 다시 나아갔다.
주어진 날들을, 특히 시작도 끝도 아닌 기약 없는 길의 중간을 묵묵히 걸어가는 이들로부터 나는 용기와 힘을 얻는다. 비루한 날이 지나고 행여 더 참담한 날이 올지라도 살아내는 그 자체로 우리는 이미 충분한 의미를 가진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놀이터를 나올 때 슬쩍 그녀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긴 땀방울이 흰 뺨에 흘러내리는 무표정하고 말간 얼굴. 내가 근래에 본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