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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버드 Nov 14. 2019

4,655번째 좋은 날.

우리 집 고양이 마레는 올해로 13살이다. 생후 3개월이 되던 때 입양했는데 지금까지 같이 산 날을 계산해 보니 대략 4,655일 정도가 된다. 마레와 살며 가장 놀라웠던 일은 그녀가 나보다 더 인생(묘생)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말로만 듣던 소위 '잘 먹고 잘 사는 법'을 나는 우리 집 고양이에게서 배웠다. 

 

직장인 시절, 오늘 점심 뭐 먹지?라고 누가 물으면 내가 단골로 했던 대답이 있다. "아무거나 좋아. 너 먹고 싶은 거 먹자."


'미식 예찬'에서 브리야 사바랭은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늘 남이 먹고 싶은 걸 먹고 집에 와서도 패스트푸드나 배달 음식으로 자주 끼니를 때웠으며 냉장고에는 유통기한 지난 우유나 음식물이 방치되곤 했다. 


그런 관점에서 마레는 자신을 매우 사랑하는 고양이다. 마레에게 '아무거나'라는 개념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매일 열정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먹고 특히 신선도를 매우 따진다. 금방 떠 온 깨끗하고 적당히 따뜻한 물, 여러 가지 맛을 섞은 푸석하지 않은 사료와 갓 삶아 따뜻한 닭가슴살, 단호박, 고구마, 구운 연어 등을 먹는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양지에서 햇빛을 듬뿍 받고 자란 캣그라스. 이제 막 연둣빛으로 싹이 오른 생명력 가득한 밀싹이나 귀리 싹을 열심히 뜯는 마레를 보면 먹다 남은 피자 조각을 데우지도 않고 손에 든 나 자신이 가끔은 머쓱해졌다. 자신에게 가장 좋은 걸 주겠다는 마레의 식습관은 '난 그럴 자격이 있는 고양이니까'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다. 


맛있고 신선한 밥을 먹고 난 뒤에는 햇빛 잘 드는 장소에 앉아 정성껏 그루밍을 한다. 봐주는 사람은 나밖에 없고 종일 집에만 있는데도 절대 몸단장을 거르지 않는다. 세심하게 앞발에 침을 묻혀 얼굴을 닦고, 등 뒤쪽, 배, 꼬리, 발바닥 순으로 빼놓지 않고 체크한다. 그런 다음 눈을 감고 햇볕을 쬐면서 고른 털을 말린다. 그 덕에 마레는 언제나 보송보송 부드럽다.


인간인 나는 때로 아니 자주 씻을 틈도 없이 쓰러져 잤다. 화장을 지우지 않고 자는 일은 일상다반사였고 아침에도 늘 출근시간에 쫓겨 아침식사는 커녕 허둥지둥 집을 나서기 일쑤였다.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자신을 그런 상황에 몰아넣지 않는 선택을. 상사에게 잘 보이지 못하더라도 굳이 늦게까지 일하지 않는 선택을 하고 정성껏 목욕하고 손톱을 정리한다. 좋아하는 향의 로션을 골라서 바르고 촉감 좋은 부드러운 파자마를 입는다. 하루 한 번은 신선한 과일과 야채를 먹고 단 5분이라도 하늘, 꽃, 나무 등을 보며 마음을 다스리려 노력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그런 시간을 만드는 것. 아무렇게나 둔 구겨진 옷, 흐트러진 물건들, 대충 때우는 끼니, 불친절한 마음 등은 삶의 우선순위에서 내가 한참 밀리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무엇보다 마레에게 배운 가장 인상 깊은 삶의 방식은 열정적으로 사랑하면서도 집착하지 않는 태도다. 마레는 나를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싶어 하면서도 서로를 편안하게 하는 적정 거리를 안다.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약간의 거리는 삶의 많은 것들을 무던히 지킬 수 있게 해 준다. 사랑을 할 때도, 일을 할 때도, 나 자신을 대할 때조차 너무 애쓰거나 몰아붙이면 금세 무너져 내린다는 걸 이 작은 고양이는 알았다.


문득 나는 4,655번 반복된 그녀의 하루를 본다. 거르지 않고 끼니를 챙기고 햇빛을 쬐고 그루밍을 하고 여기저기 부비부비 애정 표현을 하며 정성껏 사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보다 더 완벽하고 좋은 하루가 어디 있냐고, 내 작은 고양이가 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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