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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버드 Nov 12. 2019

우리를 키운 이야기.

얼마 전 전통 시장에 갔을 때의 일이다. 분주한 시장 귀퉁이에 좌판을 펼친 한 할머니가 도토리묵을 팔고 있었다. 네모난 판에 담겨 네모나게 잘린 도톰하고 몽클한 묵. 


나는 묵을 좋아한다. 양념장만 곁들여 간단하게  즐겨도 좋고 갖은 야채를 넣어 무침을 해도 좋고 따뜻한 멸치 육수에 밥과 볶은 김치, 오이 등을 넣어 묵밥으로 먹어도 좋다. 푸딩처럼 부드럽고 몽글한 식감은 어떤 재료와도 잘 어울려 무던해서 특히 좋다. 반가운 마음에 성큼 다가가 묵 두 개를 샀다. 할머니는 봉지에 묵을 담아 주시며 집에서 직접 만든 거라고 시중에 파는 것과는 맛이 다르다고 열심히 설명을 하셨다. 그 순간 외할머니가 떠오른 건 당연한 일이었을까, 우리 할머니도 묵을 참 잘 만드셨다. 


이제는 유년의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시골 외가댁은 나무 기둥을 세운 흙벽에 기와를 올린 옛날 한옥집이었다. 대청마루가 길게 난 본채에 두 개의 방이 있었고 그 앞으로 ㅁ자 모양의 마당이 있었다. 아궁이가 딸린 부엌과 화장실이 각각 본채의 왼편과 오른편에 있었고 외양간과 조그만 별채도 있었다. 양쪽으로 열리는 붉은색 나무 대문은 족히 몇십 년은 그 집을 지켜왔을 법한 나무 걸쇠로 열고 잠갔다. 


나는 외가댁이 좋았다. 여름이면 반질반질 닦인 대청마루에 앉아 수박을 먹고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구경을 했다. 저녁이면 부채질을 하며 개구리와 풀벌레의 합창 소리를 들었다. 겨울에는 산에서 불어온 바람이 창호지 바른 문을 덜컹덜컹 두드렸고 나는 할머니 손을 꼭 잡았다.


부모님은 일이 바쁠 때 나와 동생을 종종 외가에 맡겼다. 시골집에서 우리는 아무 걱정 없이 자연과 벗 삼아 뛰어놀았다. 집 뒤의 대나무 숲에서 놀다가 마을 수호신이라 불리던 아름드리 고목에서 나무를 타기도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고 있으면 할머니는 밥 먹으라며 큰 소리로 우리를 부르셨다. 동생과 나는 누가 먼저 도착하나 장난을 치면서 엎치락뒤치락 달려갔다. 아궁이에 불을 땐 시골집 방은 참으로 따뜻했다. 아랫목에 펼쳐둔 이불속에 손을 넣고 기다리면 할머니는 웃으며 개다리소반에 저녁상을 차려 들고 오셨다.


우리는 저녁으로 묵사발을 자주 먹었다. 멸치로 맛을 낸 육수에 직접 만든 도토리묵을 길게 잘라 넣고 채 썬 오이와 볶은 김치 그리고 김을 곁들인 소박한 시골 묵사발. 나는 서툰 젓가락질로 매끄러운 묵을 집으려 한참 실랑이를 했다. 결국 숟가락으로 툭툭 잘라 후룩후룩 먹은 기억. 미끌하고 부드러운 묵의 촉감과 아늑한 방의 공기, 내 머리를 쓰다듬던 할머니의 다정한 손길은 아직도 생생히 내 안에서 나를 다독인다.


음식 하나로 채워지는 그런 하루가 있다. 그때의 풍경, 소리, 분위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음이 차오른다. 유명한 맛집을 가도 맛 이상의 감흥을 느낄 수 없는 것은 그 음식에 나만의 이야기가 담겨 있지 않은 때문인지 모른다. 


다행히 엄마도 할머니의 손맛을 물려받아 요리 솜씨가 좋았다. 요리 잘하는 엄마를 둔 것은 나의 복이다.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 덕에 내 삶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오븐도 빵틀도 없는 살림이었지만 엄마는 집에서 전기밥통을 이용해 카스텔라를 만들어 줬다. 처음에 밥통으로 빵을 만든다고 했을 때 에이, 하고 믿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밥통 뚜껑을 열자 둥그렇고 커다란 카스텔라가 쑤욱하고 갈색 얼굴을 내밀었고 나와 동생은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 우리는 같이 손뼉을 치면서 식지도 않은 빵을 호호 불어 먹었다.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대단해 보였다. 어른이 되어 울적한 일이 생길 때마다 카스텔라를 사 우유에 적셔 먹곤 했는데 이제는 그 이유를 안다. 내게 그 맛은 사랑의 맛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맛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테다. 하지만 살다 보면 밥 먹는 일은 끼니를 해치우는 숙제 일 때가 많고 이야기가 있는 음식은 점점 사라져 간다. 일하면서 대충 먹는 패스트푸드, 때를 놓친 혼밥,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는 편의점 도시락 등이 자주 일상을 차지하면서 삶은 맥없이 말라가고 허약해졌다. 그럴 때면 나는 엄마에게 전화해 멸치볶음, 나물, 연근조림, 호박 부각, 고구마 샐러드 등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택배로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비틀거리던 내 하루는 언제나 엄마의 마음을 먹고 다시 살아났다.  


얼마 전 엄마는 또 다른 택배를 하나 보내왔다. 박스를 열자 샛노란 생 옥수수가 가득했다. 외할머니가 시골 밭 한편에 옥수수를 심었는데 어찌나 잘 자라는지 열 박스 넘게 수확을 했다고 한다. 옥수수는 긴 여행을 했다.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할머니의 딸이 사는 대구로, 다시 그 딸의 딸이 사는 서울까지 왔다. 냄비에 넣은 옥수수가 자글자글 삶아지며 맛있는 냄새를 풍기자 나는 왠지 마음이 푸근해졌다


내 앞에 놓인 한 끼의 이야기. 우리를 키운 팔 할은 한 끼의 따뜻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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