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주말 오전, 인왕산 자락길을 산책하고 있는데 앞서 걷는 중년 부부의 말소리가 귓가에 흘러왔다. 오십 즈음의 아내는 연신 주변을 둘러보며 굽이치는 산자락과 나무 사이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에 감탄하고 남편은 별말 없이 뒷짐을 진 채 걷고 있었다. 아내는 앞만 보며 무심히 걷는 남편에게 풍경이 너무 아름답지 않냐며 새로 산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어보라 권했다.
남편이 대충 응응, 대답하는 시늉만 하자 아내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부인 말을 들으면 자다 가도?” 웬일인지 남편이 응수를 한다. “벼락을 맞는다?” 난데없이 황당한 남편의 대꾸에 어이가 없었는지 아내는 하! 하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이내 활짝 웃으며 맞대응을 한다. “돈벼락!”생각지 못한 공격에 남편의 웃음소리가 허허허 터지고 뒤따라 걷던 나도 함께 웃었다.
서른 초반 즈음, 매일 자정을 넘겨 끝나던 야근으로부터 나를 구해준 것은 대기업 타이틀도 직장인의 마약이라는 월급도 아닌 같은 팀 후배의 아재 개그였다. 종일 모니터만 보느라 굳어버린 목을 주무르며 “아, 목이... (모기)” 하면 옆에서 후배가 허공에 손뼉을 치며 모기 잡는 시늉을 했다. 늘어지는 회식 자리에 억지로 앉아있으면 은근슬쩍 옆으로 와 “어, 여기 웬 개가 있네?” 엉뚱한 말을 했다. “개?” 하고 쳐다보면 “이쑤시개~”하는 식이었다. 썰렁한 개그에 타박도 했지만 실없이 웃고 난 후엔 이상하게 그 하루가 그런대로 괜찮아졌다.
프랑스 작가인 샹포르는 '모든 날 중 가장 완전히 잃어버린 날은 웃지 않는 날이다'라고 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어떤 위대한 가치나 목적이 아니라 가볍게 웃을 수 있는 한낱 우스개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왠지모를 안도감이 든다. 웃는 것 만으로 하루가 완성될 수 있다면 나도 한번 해볼까, 용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언젠가 친구들과 제천에 있는 가을 민속촌에 놀러 갔을 때의 일이다. 한 할아버지가 커다란 연을 하늘에 높이 띄우고 있었다. 우리가 멍하니 연을 보고 있자 할아버지가 다가와 물으셨다. "저것이 뭐로 보여?"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가오리요!"라고 대답했다. 우리의 눈에는 한 치의 의심 없이 가오리로 보였다.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시며 "예끼!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상상력이 없어~ 잘 봐~ 저건 잔뜩 신이 난 인도 코브라여!"라고 대답하셨다.
살다 보면 문득 벼랑 끝에 섰다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마음의 중량을 늘리지 말고 가벼운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겨 보면 어떨까. 웃을 일이 정 없다면 상상력으로 재밌는 일을 만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무엇이든, 잠깐이라도 웃을 수 있다면 그 하루는 잃어버린 하루가 되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