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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경아 Nov 06. 2019

나는 누군가의 봄이었을까.

얼마 전에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문득 들리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하는 신선한 웃음소리는 나에게 갑자기 봄을 느끼게 하였다. 나는 이 이름 모를 여자에게 감사의 뜻을 갖는다. 어떤 남학생이 여학생한테서 받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들여다보고 좋아하는 것을 보고, 내가 여자라면 경제가 허락하는 한 내가 아는 남학생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겠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만약 명랑한 목소리를 가진 여성으로 태어난다면, 라디오 아나운서가 되어 여러 청취자들에게 언제나 봄을 느끼게 하겠다.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  - 피천득, 인연 中 -


피천득의 수필 '인연' 중 잘못 걸려온 전화 한 통에 봄을 느끼고 감사함을 느꼈다는 구절은 내 마음에도 늘 봄을 피운다.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는 저자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살아오는 동안 나는 누군가의 봄이었을까. 선뜻 답이 떠오르지 않는 질문에 마음이 움츠러들지만 다행히 내겐 나의 봄이 되어 준 많은 이들이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봄은 외할머니다. 두 해 전, 부산 이모 댁 아파트 베란다에서 아이처럼 내게 손을 흔들던 할머니. 마르고 허리가 굽어 작은 아이 같던 할머니. 분홍색 고운 카디건을 차려입고 오랜만에 만난 손녀의 손을 꼭 잡으시던 할머니. 헤어질 때가 되자 못내 아쉬우셨던지 베란다까지 나와 내가 탄 차를 향해 손을 흔들고 또 흔드셨다. 나는 차창 너머로 한껏 고개를 돌려 점점 멀어지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손을 흔들던 할머니의 모습은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재차 확인해 준 나의 봄날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만난 담임 선생님도 나의 봄이다. 요즘 아이들은 한글에 영어까지 떼고 학교에 간다지만 나는 한글도 다 떼지 못하고 학교에 갔다. 미처 다 받아 적지 못한 받아쓰기 시험. 동그라미보다 작대기가 많아 당황스러웠던 탓일까. 그만 왈칵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흰 와이셔츠를 입은 선한 눈매의 선생님은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토닥이며 그래도 제일 어려운 문제를 맞혔다고 잘했다고 조금만 노력하면 금방 100점을 맞을 거라고 오히려 칭찬을 해주셨다. 그 덕에 나는 울음을 털어버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신나게 집으로 돌아갔다. 국어를 좋아하게 된 계기의 8할은 아마도 이날의 다정한 격려 덕분이었을 것이다. 


강남 역삼동에서 다친 길고양이를 함께 구조해 주신 119 구급대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높은 곳에서 떨어져 다친 고양이를 안고 함께 병원까지 가주었고 치료비도 사비로 반을 내주었다. 고양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 나는 울었지만 그는 가만히 앞을 보며 말했다. 세상엔 아픈 순간이 너무 많아서 자신이 더 강해져야겠다고. 거리의 작은 생명에도 관심과 사명을 갖는 이런 분들이 있어서 뉴스에서 험악한 소식이 쏟아져 나와도 조금은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었다.


일 만나는 크고 작은 인연을 다시 생각해 본다. 누군가는 내 하루에 비를 내리지만 누군가는 빛을 비춘다. 나는 무엇을 주는 사람이 될까. 많은 날을 잘 살려고 노력해 왔지만 한 사람의 하루에 아름다운 풍경으로 남는 일보다 더 잘 사는 방법을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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