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을 기억하면 떠오르는 하루가 있다. 다섯 살 즈음이었을까. 지금의 나보다도 어린 젊은 아빠와의 추억이다. 자전거 타기를 좋아했던 아빠는 쉬는 날이면 자전거 앞쪽에 빨간색 유아안장을 얹고 나를 태워 다녔다. 매미 우는 한여름,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볐다. 성실한 가장이었던 아빠는 커다란 산처럼 내 뒤를 지켰고 그 덕에 나는 마음 놓고 세상을 구경했다. 내리막을 달릴 때면 나의 짧은 단발머리가 즐겁게 바람에 나부꼈다.
스물한 살 되던 해, 그 여름날처럼 즐거웠던 하루가 또 있었다. 수업이 끝난 저녁, 좋아하는 남학생과 아무도 없는 학교 노천 강당에 간 날이었다. 우리는 잠긴 철문을 몰래 넘고 들어가 문구점에서 사 온 막대 불꽃을 태웠다. 까만 밤하늘에 별빛 같은 빛들이 팡팡 터지며 춤을 췄고 우리만의 이야기가 밤하늘에 반짝였다. 그가 환하게 웃었고 나도 웃었다.
하지만 알게 된다. 이런 날이 행운처럼 연이어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영원하리라 믿은 기쁨은 손 안의 모래처럼 순식간에 빠져버리고 힘줘 버티던 손도 무력하게 아래로 처지고 만다. 단발머리 아이는 소녀가 되며 아빠와 자전거를 타지 않았고 여자가 되며 이별에 익숙해졌다. 삼십 대가 넘어선 후부터는 지독한 공허감에 시달렸다. 텅 비어버린 느낌. 무겁고 짙은 안개를 헤치듯 괴로운 날들이 수년 째 이어졌다. 열심히 일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것들을 사들여도 상실감만이 끝없는 파도처럼 들이닥쳤다.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
그저 견디던 사월의 어느 하루. 아무런 목적지 없이 서촌 골목길을 걸었다. 오래된 한옥들이 늘어선 돌담길. 손차양을 하고 가늘게 올려다본 하늘은 눈이 부셨고 발걸음은 문득 어느 집 담벼락 아래서 멈췄다. 그리고 라일락. 낡은 담벼락 위로 반짝이는 연보라 라일락이 자신을 보라는 듯 풍성하게 만발해 있었다. 골목 끝에서 미풍이 불자 꽃들은 천사의 옷자락처럼 부드럽게 넘실거렸다. 형언할 수 없는 향기가 몰려왔다. 길가의 소음과 배경이 아득히 멀어지며 오로지 꽃과 나만 남았다. 나는 두 눈을 감았다. 마치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온 것처럼.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 여기 있어. 나를 봐. 아빠와 자전거를 타며 웃던 아이, 사랑에 설레던 여자, 힘든 시간을 버티며 자신을 지키던 사람. 나의 하루들이 어둠에서 피어나 말을 걸었다. 이제 너를 안아줘.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라일락이 아름답게 흔들리며 꽃잎들이 우수수 밀려왔다. 마치 사랑하고 사랑받은 기억만이 남았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