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개월 9일
지난달, 대전에 다녀오기 전까지는 몸이 가뿐했다. 스스로 놀랄 만큼 아침에도 개운하고 피곤하지 않았다. 새로 챙겨 먹기 시작한 밀크씨슬 때문이라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몸이 원하는 만큼 잘 자서 그런 것 같다. 지금은 몸이 완전히 망가진 기분이 든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 마치 의식이 한순간 소실되어 운전대를 놓아버릴 것만 같은 공포에 휩싸인다. 한두 번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매번 증세가 나타나니 장거리 공포증이 생길 것만 같다. 오늘도 판교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너무 죽을 것 같아서 제부에게 운전대를 넘겼다. 밥은 먹을 때마다 구토감이 스멀스멀 올라와서 괴롭다. 가끔은 이대로 몸이 빵 터져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상상이 진짜 두려움이 되어 머리를 가득 채운다.
연말에 대전에서 며칠 일하고, 자꾸 밤을 늦추는 우주를 돌보다 늦게 자고, 빵집 알바 끝나자마자 연달아 제천 여행에 서울 방문에 손님맞이까지 쉬지 않고 달리는 틈에 우주는 2차 이앓이를 시작하야 새벽에 꼭 한 번씩 깨기까지 했으니. 아무리 밀크씨슬을 꼬박꼬박 챙겨 먹어도 좋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그래서 설 연휴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대전에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대전에 가면 한의원에 먼저 가야지. 몸 상태가 어떤지 여쭤봐야 속이 후련할 것 같다.
어제 이른 밤잠에 들어갔던 우주는 정확히 8시간이 지난 3시, 그러니까 우주가 늘 중간에 깨서 우유를 찾는 타이밍에 눈을 떴다. 비몽사몽 간에 이모가 곁에 누워있으니 잠이 달아난 모양이었다. 눈치 빠른 동생은 우주가 잠깐 나간 사이, 이렇게 자는 척하면 되는지 슬쩍 물었다. 아무리 불러도 일어나지 않는 이모와 이모부를 두고 나와서 깜깜한 거실을 누비며 한참 놀다가 어느 틈에 곁에 누워 다시 잠들었다. 덕분에 우리 모두가 무지하게 피곤한 하루를 맞이했다.
서방구 점심시간에 맞춰 판교로 넘어가 팬케이크하우스에서 점심을 먹었다. 피곤한 와중에도 음식은 참 맛있었다. 우주도 맛있게 먹었다. 다시 회사로 서방구를 데려다주고 현백에서 오후 시간을 보냈다. 졸음이 쏟아지던 우주는 내 품에서 잠이 들었고, 유모차에 누이기도 성공했다. 덕분에 앉아서 시원한 음료와 함께 쉬었다.
집에 돌아와서 남은 시간은 조용히 보내다 제부가 시켜준 육개장을 맛있게 먹었다. 너무 배부르게 먹어서 차 대신 산책으로 역까지 가기로 했다. 우주와 나는 완전 무장하고 유모차와 함께 떠났다. 이모와 우주의 헤어짐이 너무 슬프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우주는 큰길로 나서자마자 지나다니는 버스에 마음을 홀라당 빼앗겼다. 버스를 꼭 타야겠다고 20분 내내 말했다. 그의 목적은 버스의 손잡이를 잡아보는 것이다.
좋아하는 기차도 마다하고 이모와 이모부가 떠나든 말든 버스 정류장에서 오매불망 버스를 기다렸다. 덕분에 수월하게 안녕했다. 유모차와 우주를 동시에 들고 버스에 탈 수 있는 건가.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 유모차에 다시 태웠다가는 길 한 복판에서 온몸으로 저항하며 탈출할 것 같았다. 그 순간, 서방구가 생각났다. 왠지 집에 거의 다 왔을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리지만 않았다면 한 정거장 더 지나 우리에게 올 수 있을 것이다!
극적으로 내리기 직전에 내 전화를 받은 서방구가 우리를 구하러 역 앞까지 와주었다. 그때 느낀 안도감은 정말 진한 것이어서 한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버스 손잡이를 잡고 가려다 기사님께 제지당한 우주는 앉아서 아련하게 손잡이만 바라보았다. 금방 내렸어도 우주는 좋다고 했다. 버스를 또 타야겠구나.
우주가 자꾸 내지 않던 새로운 발음으로 말해서 종일 기분이 이상했다. 다른 아이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어제보다 빈도가 훨씬 늘었다. '했어'를 '해꺼, 해꺼'하던 게 '해뗘'라고 하니 뭔가 트레이드 마크가 사라진 우주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아직 제 이름은 우구라고 한다. 그것도 곧 '우듀'나 '우쥬'가 되겠지. 마치 잎이 어제는 초록이었다가 다음 날 보니 빨갛게 된 것처럼. 묘하고 신기한 변화다. 이번 설에 가면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귀여움에 빵빵 터지시겠군.
여행 가고 싶다. 일단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