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생각보다 더 빨리
2017년 6월 9일. 8개월을 채우고 첫 직장을 그만 두었다.
그래도 1년은 버텨야지 하는 생각으로 수 없이 많은 고비를 넘겼는데. 결국 이렇게 생각보다 더 빨리 퇴사날이 다가왔다.
그 회사는 사원 20명 안팎의 작은 회사다. 작년 10월 입사 당시만 해도 사원은 25명이었다. 내가 지낸 8개월간 회사는 11명의 사람을 잃었다. 입사초기에 봤던 사람의 반이 없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굉장히 치사하기 때문. 회사를 다니는 내내 이 단어를 얼마나 말했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듣고 같이 욕해줬고 어떤 사람들은 원래 회사가 다 그렇다고 했다. 내 마음 속에도 역시 두 가지 말이 존재했는데, 사람들이 말했던 것과 같았다. '아 이 더럽고 치사한 회사. 당장 때려치고 싶다.' 아니면 '회사가 다 그렇지뭐. 돈 벌기가 어디 쉬운가.'
왜 나는 수 없이 많은 내면의 갈등과 결혼을 앞둔 사람으로서의 책임에도 퇴사를 결심했나. 막연히 그 회사가 얼마나 나쁜 회사인지 나열하는 것은 나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회사의 어떤 부분이 나의 가치관과 맞지 않았는지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 다음은 조금 더 낫지 않을까.
일과 휴식의 균형
어릴 때부터 꿈꾸던 생활이 있다. 3개월 빡세게 벌고 3개월 쉬고 3개월 빡세게 벌고 또 다시 3개월 쉬고. 마치 대학교처럼 말이다. 그래서 인생의 황금기를 꼽으라고 한다면 언제나 주저하지 않고 대학생활을 말하곤 한다. 한국에서 태어나 그런 삶을 꿈 꾼다는 건 굉장히 사치스러운 일이지만 아무튼 나는 아직도 일과 휴식이 5:5인 삶을 사는게 꿈이다.
물론 지금은 현실에 맞추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 쯤은 알고 있다. 그래서 나름대로 주어진 월차와 연차를 알차게 쓸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회사의 연차제도는 조금 독특했다. 연차에서 공휴일을 제했다. 뭐? 공휴일이 연차보다 많은 해에는 그럼 어쩌라는 거지? 연말 휴가 정산때, 연차보다 많이 쉰 사람은 돈으로 토해내야한다.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둔 나는 8개월치 월차를 제하고 쉰 나머지 공휴일들을 돈으로 토해내야 한다.
연차에서 공휴일을 제할 수 있는 내규상 핑계는 이렇다. '공휴일은 무급휴일이나 급여를 동일하게 지급하고 연차에서 갈음한다.' 하. 입사당시 그 내용을 내가 못알아 들을까봐 열심히 설명했던 팀장의 얼굴이 선명하다. 문장 자체를 이해못한건 아니었는데.
왜 이런 제도를 만든 걸까 궁금했다. 법대로 하면 훨씬 편할텐데. 머리 아프게 저런 어려운 말로 포장해가면서 신입직원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텐데. 8개월 동안 지켜본 결과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직원들의 쉼이 싫어서. 일단, 연차를 샌드위치가 되는 날이나 휴일 앞뒤로 붙여쓰지 못하게 했다. 연차 사유도 관리해야겠다며 왜 쉬어야하는지 납득이 갈 만한 이유를 적어 보고하게 했다. 연차를 쓰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프로젝트와 프로젝트 사이에 담당자가 갖게 되는 꿀 같은 쉼도 회사는 용납하지 못했다. 매번 새로운 것을 창조 해내야하는 직업특성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그 잠깐의 쉼이 재충전의 기회가 되기도 하고 다음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 되기도 하는데. 일이 없이 시안을 찾고 있거나 막간을 이용한 공부를 하고 있으면 득달같이 달려와 뭐하고 있느냐 물었다. 신혼여행을 가야하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은 '일에 지장 없지?'. 조부상을 당해 삼우제를 지내러 가야한다는 직원에게는 '나는 니가 거길 가야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상호 신뢰
어떤 분야에 대해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본가가 능력을 갖춘 전문가를 고용할 때는 기본적으로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한다. 자본가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실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실제로 업무의 전방에 서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믿어야 일을 맡길 수 있고, 일을 맡은 사람도 그 신뢰를 바탕으로 기분좋게 업무를 처리해나갈 수 있다.
그 회사는 신뢰라는 걸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디자인 전공도 아닌 대표와 PM의 컨펌을 반드시 받아야 했다. 1차 시안이 가기도 전에. 대표와 PM의 취향이 아닌 색이나 레이아웃은 버림받았다. '이런 색 쓰지마!'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디자이너들은 내부에도 클라이언트가 있다며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어느 날 부터인가 대표가 디자이너들더러 아이디어 스케치를 그려오라고 한 적이 있었다. 인디자인에 바로 원고와 사진을 얹어버리지 말고 본인에게 아이디어 스케치를 검토 받고 시작하라고 했다. 디자인 전공이었던 다른 친구들은 당연히 콧방귀를 뀌고는 단 한번도 스케치를 해간적이 없다. 나는 배우지 않았으니 대표가 우습기는 하지만 스케치를 하고 나면 도움이 될까 싶어서 매번 해보았고 검토도 받아 보았다. 그 검토는 세 번을 채우기도 전에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대표가 봐도 모르겠으니까 점점 검토 받으러 오는 순간을 피하기 시작했다. 회사에 오지 않았다. 호기롭게 직원들을 두 세명 씩 회의테이블로 불러내, 반드시 스케치를 검토받으라고 말했던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스케치 검토의 실패 이후에는 주에 한 번 있는 회의때 보고 받았던 직원들의 스케줄을 더 자주 관리하기 시작했다. 1차, 2차 시안이 간 후에 클라이언트로부터 수정사항을 기다리는 건 일이 아니니까 그런 것들은 제외하고 스케줄을 적어오라고 한다던지 회사에 들어와 사원들 모니터를 지켜보고 하루종일 이것만 붙들고 있냐는 식의 조롱을 하고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선임들을 불러 사원들 스케줄 관리 똑바로 하라고 다그치기도 했다. 이 모든일이 숨도 못쉬고 과제들을 쳐내던 와중에 일어났으니, 직원들이 얼마나 속이 답답했겠나.
디자인을 배운적도 없으면서 디자이너들을 오래 봤다는 이유로 주제에도 맞지 않는 컨펌을 하겠다고 하는 것. 봐도 모르는 아이디어 스케치를 시키면서도 바쁘게 일을 쳐내야하는 일정 중에 스케치를 한다는 게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인 줄 모르는 것. 늘 직원들이 놀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자꾸만 감시하려 드는 것. 이 모든 게 본인의 상황과 직원들의 상황을 제대로 인지 하지 못해서 생기는 신뢰의 부재 탓이다. 열심히 하고 싶다가도 모든 의욕이 사라지게 되는 신뢰의 부재.
주제 파악
회사는 몸집에 맞는 경영 방식을 택해야한다고 배웠고, 그 사실에 마음 깊이 동감한다. 작은 회사가 괜히 큰 회사의 시스템을 택했다가는 회사 전체가 체한다. 가랑이 찢어지는 일이다. 크고 작음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장단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에 맞는 방식을 선택할 줄 알아야 지혜로운 것이다.
회사를 다니며 가장 답답했던 부분은 참 주제 파악이 안되는 회사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스스로 굉장히 주제 파악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작은 것 나름의 장점을 살려서 경영하면 얻을 수 있는 이점이 많아 보였는데, 매번 정반대의 안타까운 일을 벌렸다. 사원 교육이랍시고 매달 발표를 시켰다. 굉장히 무의미했다. 회사에서 사원에게 제공하는 INPUT이 없는데 매달 OUTPUT을 기대하는 꼴이다. (앉아서 발표를 듣고 평가하는 그 시간이 굉장한 자기만족 같아 보였다.)
보고체계를 강화해야 한다며 이 작은 회사에 그룹웨어 모니터링 요원을 하나 두고(심지어 그분은 글을 쓰던 분이었음에도 모든 업무를 중단하게 하고) 등록된 과제들에 관해 관리하기 시작했다. 모든 과제에 관해 개요, 과정, 기대효과, 결과 등의 내용을 상세하게 적게 했다. 당하는 사원의 입장에서는 그 모든 일이 체계를 잡기 위해서라기 보다 모든 과제를 감시하겠다는 의도로 느껴졌다. 왜냐하면 그 보고가 유용하다고 믿는 사람은 그 회사에서 단 한명, 이사뿐이었기 때문이다. 몸집이 커서 의사소통이 어려운 큰 회사에나 필요한 보고체계를 주워와서 사용하니, 다같이 체할 수 밖에 없다.
회사 홍보를 위해서 홈페이지와 페이스북을 관리해야겠다며 '전략업무'라는 이름으로 전담 사원을 한 명 정해 괴롭히기 시작했다. CI는 당치도 않는 이유로 계속 바뀌었고 페이스북에 들어갈 회사 전경 일러스트 역시 완성된 그림을 엎고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지시하기 일수였다. 전략업무에 지쳐 전담 사원은 회사를 떠났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 진행된 전략업무는 나에게 떨어졌다. 지난 달 체육대회 후기 게시글을 올리는 업무였다. 게시글을 올리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 회사의 모든 일이 그랬듯 서서히 내 자리가 옮겨지는게 아닐까 하는 예상이 마음을 어렵게 했다. 불행은 현실이 되었고 이게 바로 퇴사의 이유가 됐다.
홍보물을 기획하는 기획사의 홈페이지에서 가장 중요한 컨텐츠가 무엇일까. 나는 그 회사가 하고 있는 업무와 성과들을 정리하고 보여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회사는 결과물을 숨기고 보호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 따위 관심이 없었다. 회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홈페이지에 올리는 일은 이미 소문이 나서 네임밸류가 상당한 회사에나 어울리는 일이다. 이 작은 회사가 홍보를 하려면 '우리는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놓고 보여주며 소리를 쳐도 사람들이 볼까 말까 한다. 회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잘못된 사람과 1대 1로 업무를 수행한다는건,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되겠다 판단했다.
정리한 것 말고도 퇴사의 이유는 많았다. 돈에 관해서는 언제나 짠돌이었던 순간들, 전체회의 한 번 가지지 않고 매번 윗사람들 고작 몇 명만 모여 회사의 모든 일과 사원들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말아버리는 것, 특별한 사유가 없이는 도난의 위험때문에 외장하드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것, 업무 특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지시들, 질책들.
숨이 막혔다가도 지나가면 괜찮을거야 다짐했던 시간이었고 그것의 연속이던 8개월이었다. 홀가분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지금, 지치고 병든 몸과 마음을 회복하며 다음 회사에는 꼭, 존경할 만한 어른을 적어도 한명이라도 만날 수 있길 기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