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까지 아프며 살아야 하는 걸까
“성인 수두요?”
새벽 3시. 연세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에 2중 보호 문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한 격리실에 나 홀로 처박혀 있던 내가 재차 물었다.
“아니.. 성인.. 성인 수두라고요?”
병원에 온 지 언 5시간 20분 만이었다. 전날 38도의 고열 증상에 ‘감기 기운인가?’ 갸우뚱하는 회사 근처 내과의의 별 볼 일 없는 처방전을 받아 들고 산더미 같은 회사일을 뒤로하고 집에 돌아와 해열제를 먹은 지 2시간만. 온몸에 빨갛게 좁쌀 여드름처럼 번져가는 발진을 보고 ‘아, 이건 좀 아니다’ 싶어 신랑과 함께 응급실을 찾았다.
응급실 입구에서 형식적으로 안전요원이 물었다.
“고열이나 발진은 없으시죠?”
“있는데요?”
“네??”
“있어요.”
“아니, 고열이나 발진이요. 발진 맞으세요?”
“네 온몸에 발진 났는데요?”
“최근 2주 안에 해외 다녀오신 적 있으세요?”
“네 있어요.”
“아니, 해외 맞으세요?”
“네, 파리랑 일본 갔다 왔어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안전요원이 어디론가 무전을 날렸고 곧 또 다른 안전요원이 나와 나를 응급실 뒷문으로 데리고 갔다. 그 사이 주차하러 간 신랑이 혹여나 나를 못 찾을까 봐 토끼눈이 되어 연신 뒤를 바라보며 안전요원을 총총 따라가는 내 모습은 마치 피난길에서 가족과 길이 엇갈려 생이별을 맞이하기 직전의 아낙네와도 같았으리라.
간호사 1명과 1.5시간 간격으로 격리실로 찾아왔던 소속모를 4명의 의사. 그리고 피를 뽑느라 내 손목에 처박은 두꺼운 주사와 링거. 이미 새벽 3시에 너덜너덜해진 내 비루한 체력으로는 수두라며 무미건조하게 질병에 대한 설명과 진행상황을 설명하는 피부과 의사의 말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4일. 응급실을 찾기 전 약 3일 전부터 컨디션은 매우 안 좋았다. 이미 성수기를 앞두고 고도 상승을 올리고 있는 업무 텐션 속에서 이미 예약했던 파리 여행을 다녀와야 했고, 파리에서도 있는 내내 비가 내리고 날이 추워 컨디션이 저조했으며, 파리에서 돌아와서는 비행기에서 무얼 잘못 먹었는지 4일간 내리 설사를 했다. 그리고 겨우 정신 차릴만하니 일본 출장이었다. 그나마 일본 출장은 강행 스케줄이 없어 정말 호텔에 박혀서 푹 쉬다 왔다. 침대를 뒤척이는 신랑도 없었고, 새벽에 엉뚱하게 애교 부리며 깨우는 고양이 녀석도 없는 이 얼마나 오랜만의 독방 라이프였는지.
그렇게 사무실로 온전히 복귀한 월요일. 아침부터 심한 두통에 타이레놀을 연신 먹어야 했고, 눈 언저리마저 지끈거려 고개를 돌리거나 눈동자를 움직일 때마다 심각한 두통이 따라왔다. 으슬으슬, 감기 기운인 듯 점점 나빠지는 컨디션. 결국 목요일 오후, 중요한 회의였지만 거의 회의 테이블에 누워서 회의를 하던 나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나 병원을 갔다 와야겠소’를 외치고는 회사 앞 내과를 찾아야 했다.
이상한 감기 기운 증상, 갑작스러운 고열, 그리고 머리부터 점점 몸으로 퍼져 나가는 발진. 명백한 수두였다.
딱히 감염자와 닿을 일도 없었고, 주변에 수두를 않는 아이를 키우는 가정도 없었다. 그냥 나 혼자 수두에 걸려서 이 꼴이 되다니, 결국 원인은 모든 만병의 원인으로 검색되는 두 친구.
‘면역력 저하와 스트레스’
이젠 새롭지도 않고 그저 웃기기만 한다. 하, 이젠 수두라니. 이젠 하다 하다 못해 수두까지 오다니.
자가격리로 4일째 침대방을 독차지하고 누워있으니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두드리며 찾아온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아니 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병이 나며 나는 살아야 하는 걸까.
올해는 시작부터 고행길이었다. 갑작스러운 팀장의 퇴사와 인력 보충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계약직 직원을 2명이나 계약 해지하고, 그 와중에 조직개편이라며 팀은 불안정해가고, 그나마 남아있던 직원마저 퇴사했다. 매일매일의 업무가 부담이고, 아침마다 출근길이 괴로웠다. 심적인 부담과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 끝이 보이지 않게 쌓인 내가 회신을 줘야 하는 메일들. 이 와중에 찾아오는 성수기까지.
회사 일은 결코 나를 위한 일이 될 수 없다. 물론 뭐든 다 쓸모가 있을 것이고, 경력이 되고 경험이 된다 하지만, 회사가 잘된다고 내가 잘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뼈와 살을 갈아서 일을 한다 해도 크게 변화하는 것은 없다.
요즘의 나는 정말 어떤 목적과 이유가 있어서 일을 한다기보다, 당장 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그리고 당장 막아야 하는 이슈들을 몸빵 하기 위해 일하고 있는 기분이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아니 수두까지 걸려가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난 이 삶을 오래 살고 싶지 않은데.
내가 살고 싶은 삶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는데...
내 성격상 분명 어떤 삶을 살든 스트레스를 잘 받고, 그걸 병으로 분출해가며 살 인생이라는 것은 스스로 잘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삶에서의 내가 이렇구나는 이제 알만큼 안 것 같다. 내가 선택하는 다른 삶에서의 나는 어떨지, 그 삶에서의 스트레스는 지금의 삶보다는 덜할지가 알고 싶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
33살의 성인 수두는 나에게 '아프지 않은 삶을 꿈꿀 것'이라는 다짐을 하게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