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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노래 Oct 22. 2020

귀뚜라미가 울면

입추를 지나자마자 귀뚜라미가 날개를 비벼댄다. 기막힌 절기의 변화를 귀뚜라미가 먼저 알아차리는 걸까.

아니면 입추라는 단어를 통해 내 귀가 열려 귀뚜라미의 소리를 인식하게 된 것일까. 

딱 오늘부터 약속이나 한 듯 귀뚜라미가 동시에 울어대지는 않았을 것이니, 내 귀가 간사한 것이겠지. 

귀뚜라미는 올해도 내게 제 몸을 읽어가며 절기의 변화를 알린다. 



어릴적 사내아이들은 센척하며 놀았다. 그 센척이라는 것이 어두운 지하실을 혼자 들어가 거닐 수 있다거나, 

커다란 곤충을 맨손으로 잡고 죽이는 일, 커다란 개가 짖어도 부리나케 도망가지 않는 일 들이었다. 

제법 담력이 좋은 편에 속했던 나는 어지간한 일에 잘 놀라지도 않았거니와 귀신 따위를 믿지도,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동네에 귀신 씌인 할아버지가 산다는 지하실이 있었는데, 그 지하실에 밤에 혼자 내려가 낮에 굴러들어간 공을 찾아오기도 했다.

그런내게 귀뚜라미는 유일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바닥을 휘젓고 다니는 엄지발가락 만한 바퀴벌레도, 다리가 수십개쯤 달려 있는 돈벌레도 손바닥으로 모두 탁탁 쳐서 한방에 죽여 없앴는데, 유독 귀뚜라미는 달랐다.

거뭇하게 툭 튀어나온 등짝과, 기이하게 꺾여있는 여섯 다리,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 움직임.

마치 당장이라도 툭 튀어서 내 눈에 들어갈것만 같고, 그 커다란 녀석이 내 눈알로 들어와서 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상상을 하게된다. 

방 구석에서 마주친 귀뚜라미는 나를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어릴적 나긋한 목소리로 처음 알게된 귀뚜라미는 내게 가장 먼저 가을을 알려왔다.

귀뚜라미가 울면 가을이 오는거야. 가을이 오면 여름내 등등했던 나쁜기운이 달아나고 다시 좋은일들이 일어나게 돼.

할머니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귀뚜라미를 소개 받았다.

얼굴을 마주하고 소개받은 것이 아닌탓에 귀뚜라미는 아주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소리도 이름도 얼마나 귀여운가. 세상에. 귀뚤귀뚤 귀뚜라미라니.



난생 처음 아주 가까이서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들려 집안 어딘가에 있을 귀뚜라미를 찾아 헤집기 시작했다.  

혼자 있는 집에서 귀여운 귀뚜라미 친구를 만나볼 생각에 설렜다.

책상밑을 뒤져보면 화장실 쪽에서 나는것 같고. 화장실에 가다보면 텔레비젼 쪽에서 나는것 같고.

귀뚜라미가 돌아다니는건지 귀두라미의 소리만 돌아다니는건지 도무지 헷갈릴 무렵. 소리가 멎었다.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는데  '팍' 하고 튀어 무언가 내 발등에 앉았다.

손가락 마디만한 시커먼 몸체에 선명한 가시가 잔뜩 돋은 꺾인 다리가 가장먼저 눈에 들어왔다.  온 머리칼이 쭈볏 서고, 발등의 혈관이 모두 얼어 붙는것 같았다. 마치 녀석이 기다란 촉수를 뽑아서 내 발등에 깊이 꽂아 넣은게 아닐까 생각했다. 



온몸을 진저리 치며 발을 내 뻗었는데 내 발에서 벗어난 녀석이 벽에 툭하고 부딪친 후 내 얼굴에 맞았다.

얼굴에 맞고 옷속으로 들어간것만 같아 소리소리를 지르며 미친듯이 온몸을 떨어냈다.  녀석은 다시 발밑에 있었다.

툭툭 제 몸의 수십배 높이를 펄쩍 뛰어가며 달아나고 있었다. 달아나다가 다시 구석에 몰려 녀석은 나를 노려보았다.

이집은 원래 내 집이었는데, 니가 내 자리를 빼앗았어. 그렇게 말하는듯 계속 나를 노려 보았다.

기억의 잔상은 길었고. 여운은 깊었다.



귀뚜라미가 더이상 무섭지 않게 될 무렵, 가을의 깊이를 선물 받았다. 


나쁜 기운을 쫓는다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는 무덥고 지난한 여름날을 보내고 노란 가을을 불러오는 주문이 되었다. 

노오란 가을에 나는 할머니의 말을 좇아 좋을일들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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