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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isie Dec 26. 2020

할머니의 시계는 거꾸로 흐른다

불운과 함께 춤을

치매 노인과 함께 살아가는 일은 육체의 고단한 만큼이나 정신적, 감정적인 에너지 소모가 크다. 적어도 우리 가족만 놓고 보면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의 움직임을 돕거나 식사 혹은 약을 챙겨 드리는 것, 씻기는 일 같은 것보다는 할머니께서 던지시는 말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더 심하다. 분명 할머니가 치매라는 것도, 그래서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계시는지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되려 의식과 무의식 그 언저리 어딘가에 깊게 뿌리내린 본심인가 싶어 진지하게 듣고 만다.

-이 집은 누구꺼고? 네가 샀나?
-네, 우리 집이에요. 여기서 30년 같이 사셨잖아요.
-어릴 때부터 독하고, 틈이 없더니 이래 좋은
집을 샀구먼. 큰아들은 집도, 절도 없이 우야꼬. 장남이 잘 살아야 하는 법인디.
-어머니, 그럼 형님 집으로 가세요. 모셔다드릴게요.
-뭔 소리고. 갸 집에 가봤나. 집구석에 쌀 한 톨 없다. 나는 다시는 거기 안 갈란다. 이래서 집안에 여자가 잘 들어와야 하는 법인디. 쯧쯧. 근데 니는 아들 없나? 나는 아들만 둘인디, 니는 아들도 못 낳고 모했노? 내 아들은 난제 누가 제삿밥 차려 주노? 으잉? 대를 고만 탁! 끊었어.

할머니와 엄마의 대화인데, 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엄마는 정말 억장이 무너진다고 하신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레퍼토리임에도 여전히 흘려듣는 것조차 잘되지 않는다며 속상해하셨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안방 문을 꼬옥 닫고 나오질 않으셨다. 더 듣고 있다가는 할머니를 밀칠 것 같은 기분이 드셨다고. 나 역시, 동생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냥 두서없이 이전에 하던 말을 반복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매번 그 말에 감정이 상하고 격렬하게 동요하고 만다.

게다가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번번이 상처 받았다. 아마 가족들도 그랬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와 함께 살아온 긴 세월은 사랑보다는 생계와 필요 때문이 아니었겠냐는 의심이 확신으로 자라기도 했다. 물론 할머니는 종종 “나는 네만 보면 기분이 좋다.”라고도 하시고, 굶지 말고 꼭 밥을 먹으라며 살뜰히 챙겨주시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쉬이 휘발되고, 부정적인 감정과 기억들만 켜켜이 쌓인다. 할머니를 향한 원망과 분노의 감정은 분출되지 못하고, 어딘가로 흘러가지도 못 한 채, 한 자리에 고이고 고여, 모두를 점점 피폐하게 만드는 듯하다.

사람이 참 자기중심적인 것이 이럴 때는 할머니께서 현실 감각이 떨어지고, 환각을 보기도 하며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라는 걸 부정하고 싶나 보다. 그런 상황에서 하는 말씀임에도 결코 허투루 듣지 않는다. 오히려 더 귀담아듣고 이것이 진짜 깊게 각인된 진심이 아닐까 하고 의심한다. 이래서 그 누구보다도 가장 사람을 힘들게 만들 수 있는 게 가족 관계인 것 같다. 다른 어떤 관계보다 현명하게 갈등을 다루는 것도, 합리적으로 판단하기도 어렵다.

충분했다, 아니다를  떠나서 우리는 모두 할머니가 운전하는 기차에 무임승차를 했었고, 그녀의 보호와 헌신으로 성장해온 때가 있었다. 아무리 할머니를 원망해도 절대로 변치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면, 할머니가 거친 비바람 속에서 우리의 우산이 되어주셨던 때가 있었다는 점이다. 좋든 싫든 우리는 서로 간의 책임과 헌신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남다른 관계였다. 우리는 서로를 돌보고 책임지는 가족이다. 그것은 지금도,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작가 비비안 그린이 말했다.

“인생은 폭풍우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빗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지금 우리 가족에게 이보다 필요한 말이 있을까. 우리가 그때의 할머니처럼 우산이 되어 드릴 수 없다면, 이제는 함께 빗속에서 춤을 추려한다. 가족을 향한 할머니의 진심이 무엇인지 의심하며 쓸데없는 상상으로 괴로워하기에는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이 너무나 짧다. 이제는 제대로 빗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울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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