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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isie Sep 24. 2020

할머니의 시계는 거꾸로 흐른다

이불속에 잠든 나의 작은 모험을 위하여

2017년 볕이 따뜻해질 즈음, 처음 진료실에 찾아갔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우울증으로 상담을 받기 시작한 지 벌써 햇수로 3년이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온전하게 이야기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상담 초반에 가족과 관련된 질문들을 받으면 나름 성실하게 대답은 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내가 먼저 가족 이야기를 꺼낸 적은 거의 없다. 가족의 역사에 엄청나게 불우한 과거가 있었다던가, 말 못 할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가 하는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마뜩잖았다.

어릴 때부터 ‘다들 그렇게 가족 간에 투닥거리면서 살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딘가 밖으로 꺼내 보이기에는 부끄러운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해온 것 같다. 적확하게는 우리 가족이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우리 집안-아빠는 여전히 이 곳에서 소속감을 찾으려 한다. 나라면 진즉에 손절하고 살았을 텐데.-이 문제였다. 대개 우리 가족을 심란하게 만들고, 다툼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근본적인 문제들은 그곳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의 가족이란 조각이 필요했고, 가족 구성원 간의 문제를 살펴보는 일은 필수적이었다.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부모님을 거쳐 조부모님과의 일들을 풀어놓는 작업은 좀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특히나 그것을 전문가이긴 하지만 전혀 상관없는 사람과 함께 더듬어 가야 한다니, 상상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오르고 답답해졌다. 뾰족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냥 부끄럽고 숨겨두고만 싶었다. 하여 가장 솔직해져야 할 진료실 안에서 조차도 나는 쉬이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러다 대략 1년 6개월 전 할머니가 치매 판정을 받았다. 그 뒤에 우리 가족의 생활은 완전히 바뀌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것들이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고, 혼자 하실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독립했던(?)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동생은 1년 정도 휴직을 하며 할머니를 돌봤다. 그 후에 바통터치를 하듯이 엄마가 완전히 은퇴하셨고,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자리를 누비던 아빠는 반주 후 집에 일찍 귀가하게 되셨다. 우리는 더 자주, 오래 할머니를 지켜봐야 하고, 자연스레 우리 가족은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에 지금처럼 적절한 때가 또 있을까. 굳이 예전의 기억에 의존하여 힘겨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지금은 우리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을 것 같다. 이를테면 치매 노인과 함께 살고 있는 우리의 일상은 어떻게 변했는지, 무엇이 힘들고 무엇이 다행스러운지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다 보면 잊고 있었거나 혹은 외면하고 싶었던 일들도 불쑥불쑥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그때마다 차분하게 글로 꾹꾹 적어 내려가다 보면, 조금은 나와 가족들에 대해 이해하게 될까. 그리고 좀 더 편안하게-진료실에서라도-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꺼내게 될까.

현재 우리 가족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연스레 과거를 더듬고, 미래의 우리 가족은 어떠한 모습일지 떠올려 보고 싶다. 몇 년이 걸릴지, 혹은 그 과정이 얼마나 고되고 험난할지 두려워하지 않고, 이제는 여행을 떠날 결심이 섰다. 그것이 이제 시작될, 오랫동안 이불속에 꽁꽁 감춰 왔던, 나의 작은 모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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