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걸음의 시작
할머니는 80대 중반까지만 해도 정정하셨다. 가족 중 누구보다 더 또렷하게 많은 것을 기억하셨다. 일제시대를 거쳐 6.25까지 경험하신 분이다 보니 살아있는 역사책이셨다. 무엇이든지 할머니가 걸어오신 지난 시간에 대해 여쭤보면 인고의 기록들을 주욱 읊으셨다. 나는 상상도 못 할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만큼은 즐거웠다.
지금의 할머니에게는 인생의 모든 기억들이 끊어지고,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아주 짤막짤막한 기억의 조각들을 꺼내시기는 하지만 한 편의 완성된 이야기 자체를 듣기는 힘들다. 적확하게는 오늘도 과거의 어느 날을 살아가고 계신다. 이제 할머니는 계절의 변화도, 낮과 밤의 변화도 거의 알지 못하신다. 한여름에 춥다고 내복을 꺼내 입으시고, 한겨울에 덥다고 반팔 차림으로 계시기도 한다.
무엇보다 할머니의 특기는 숨기기인데, 얼마나 잘 숨기셨는지 지금 우리가 뒤져도 찾지 못하는 물건들이 제법 있다. 이전에 사드린 미아방지 팔찌라던가, 나의 줄무늬 티 같은 것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할머니는 방 곳곳에-진짜 상상도 못 할 곳까지-숨겨둔 물건들이 정확히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계셨다. 그 방은 할머니의 작고 비밀스러운 우주였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서서히 건망증 같은 것들이 나타났다. 으레 열쇠를 어디에 뒀더라 정도의 일상적인 것들에서 출발해 전자레인지 위의 냄비가 탈 때까지 모르시는 때가 오고 말았다. 사실 그때까지도 우리는 사태를 전혀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 우리 가족 역시 이전에는 치매 노인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고, 으레 나이가 들면 나타나는 ‘아이고, 깜빡했네~!’라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할머니는 엄마의 생일 무렵부터 빠르게 치매가 진행되었던 것 같다. 먼저 엄마의 생일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은 달력의 표시를 보고 아셨던 거였다. 정확히 음력 몇 월, 몇 일인지 그것을 기억하신 게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엄마의 생일상에 놓을 미역국 재료를 사러 가게에 갔을 때 돈 계산을 못 하셨다. 아예 얼마를 내고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 헷갈리시는 것 같았다. 그 당시에는 단순히 암산이 잘 안 되시나 보다 라고 생각했지, 그것이 퇴행의 시작이라고는 전혀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할머니의 상태는 정말 눈에 띄게 나빠졌다. 티브이를 켜는 방법조차 헷갈려하셨고, 가스레인지를 쓰다가 불을 낼 뻔한 것도 수차례였다. 그제야 우리 가족은 할머니 혼자서 본인을 돌볼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 여전히 할머니가 치매는 아닐 거라며 서로를 다독이면서...
할머니는 그렇게 뒤로, 뒤로 걸음을 옮기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