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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isie Oct 16. 2020

할머니의 시계는 거꾸로 흐른다

우울증과 치매 그 사이 어딘가

노인의 경우 치매와 우울증을 구별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노인이 우울증에 걸릴 경우 단순히 기분만 우울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력이나 판단력 등의 인지 기능이 저하되고 망상, 불안과 같은 정신행동 증상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심 할머니가 우울증을 앓고 계신 걸지도 모른다며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했다. 역시 오랜 기간 쌓인 연륜은 무시할 수 없는지 검사 당일 아침에는-뭔가 느낌이 싸하신 건지-굉장히 논리적인 핑계를 속사포처럼 쏟아 내시며 대문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 버티셨다. 그런 할머니를 간신히 어르고 달래 병원까지 겨우 모시고 갔다.

인지 능력을 검사하는 테스트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우울증 판별을 위한 심리 검사지는 정말 가장 큰 난관이었다. 할머니는 까막눈이셔서 동생과 내가 번갈아 가며 큰 소리로 지문과 선택지를 읽어드려야 했다. 다행히 짜증 한 번 내지 않으시고, 성실히 답변을 해주셔서 1시간 이상 지체되지는 않았다. 나는 막연히 할머니가-우울증이거나 치매이거나-속상하고 불행하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다행스럽게도 그건 아니었다. 그냥 습관적 혹은 형식적으로 대답하셨을 수도 있지만, 할머니는 대개 삶이 즐겁고 만족스럽다는 쪽을 선택하셨다. 할머니가 느끼는 당신의 노년은 제법 안정적이고 행복하다는 것에 괜스레 울컥하고 안도감을 느꼈다. 지금의 이 사태가 우리가 할머니를 잘못 모셔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무거웠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어쨌든 90세를 바라보는 할머니께서 우울과 무기력과 싸우며 마음고생을 하진 않으셔도 된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내심 우리 가족은 할머니의 우울증을 치료하면, 인지 기능이 회복될 거라고 믿었지만 아쉽게도 우울증이 아니었다. 다만 의사는 이것이 갑작스럽게 걸린 중한 병이 아니고, 할머니의 연세에서는 자연스러운 퇴행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당연한 노화의 과정이니까, 이 또한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대신에 인지 기능이 떨어지는 속도를 늦추는 치매약과 수면유도제를 처방받았다. 사실 치매 노인과 수면유도제라고 하면 뭔가 불순한 느낌이라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물론 우리 가족도 할머니가 너무 힘겹게 하실 때는 ‘그냥 수면제 드리고 재울까’라는 생각을 해봤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아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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