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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isie Mar 15. 2021

할머니의 시계는 거꾸로 흐른다

우리 할머니 참 곱다

수천수만 장으로 늘어난 핸드폰 사진들을 보며, 정리가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저래 널브러진 사진들은 어지러운 나의 마음과 머릿속처럼 느껴져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핸드폰의 앨범을 들여다보다 몇 년 사이에 급격히 늙어버린 할머니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10년, 20년 전도 아니고 1년 사이에 할머니의 모습은 참 많이 변해 있었다. 아주 작고, 여윈 모습으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검버섯이 피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몹시 슬퍼진 이유는 더는 할머니의 눈빛에서 생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할머니는 댕댕이와 동생의 산책에 종종 따라나섰다. 물론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날이 대다수였지만, 가끔 볕이 좋고 바람이 좋은 날에는 순순히 따라오실 때가 있었다. 항상 칠렐레 팔렐레 무조건 전진하는 댕댕이도 그때만큼은 할머니의 걸음에 맞춰 걸었다. 평소에 그 누구에게도 배려하지 않는 녀석이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와 함께 나오면 그 속도에 맞춰 느릿느릿 움직이는 모습은 제법 신기했다. 그래서 1년 전의 앨범에는 드문드문 공원의 화사한 꽃이나 푸르른 나무들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몇 장 끼어 있다. 옅은 미소를 띤 채 바깥바람을 쐬는 할머니의 표정은 꽤 자연스럽고 생동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최근에는 집안에서 찍은 것이 전부였다. 치매 증상이 점점 심해지면서 더더욱 외출하기를 거부하셨기 때문이다. 정말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나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할머니를 보면 놀랄 때도 많다. 할머니께서 하시는 그 말만 놓고 보면 굉장히 현실적이고 제법 논리적이라서 우리 할머니가 치매가 맞나 싶을 정도다. 물론 그것이 다 거짓말임을 알고 듣는 것이지만, 가끔 이야기의 구성이 (생각 외로) 탄탄해서 흠칫하게 된다. 이것은 단지 내 추측이지만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만큼, 본능적으로 그 자리를 두려움이 대체하는 게 아닌가 싶다. 안 그래도 낯설게 느껴지는 것 투성인데, 하루 중 얼마나 자주 막막한 순간을 마주하실까. 어쩌면 한 번 나가면 집에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거라는 공포를 느끼시는지도 모르겠다. 이전에는 종종 본인의 집에 가겠다고 패기 있게 뛰쳐나가실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그러시지도 못하시니까. 점점 더 할머니가 안쓰럽다.


이전의 숱 많고 까맣던 머리는 이제 하얗게 셌고, 이젠 뽀얀 두피도 듬성듬성 보이게 되었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 가끔 검은 머리도 나기 시작했는데, 할머니가 회춘하시나 보다고 가족들 모두 깔깔 웃었더랬다. 물론 모두 할머니께 이전과 같은 활력이나 총기가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다들 정정하시던 할머니가 아주 그리운가 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무기력하고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게 앉아 계시는 날들이 많아진다. 할머니를 불러 카메라를 쳐다보시게끔 해보기도 하지만, 힘 있게 응시하지 못해 멍해 보이신다. 그나마 웃거나 움직이고 있는 사진은 댕댕이를 놀아주실 때 옆에서 도촬 한(?) 것들이다.


연세보다 동안을 자랑하셨던 할머니의 고운 얼굴은 더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소녀 감성은 여전해서 고운 색깔의 옷이나 꽃이 흐드러지게 핀 화분을 보시면 아주 좋아하신다. 그 순간만큼은 기운 넘치고 당신을 단장하기에 여념이 없던 그때의 할머니로 돌아가시는 듯하다. 이제라도 할머니와 눈이 마주치면 우리 할머니 참 곱다고 말씀드려야겠다. 사실 말 한마디 할 시간이 없진 않은데, 그게 뭐라고 늘 인색했을까. 아무래도 할머니가 치매라 내가 고단하다는 생각만 앞세운 채, 자기 연민에 빠져들었었겠지. 오늘은 까먹지 말고 꼭 해야겠다. 


“우리 할머니, 참 곱다. 참 고와.”


분명 소녀처럼 수줍어하며 웃은 할머니의 얼굴을 다시 마주할 수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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