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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isie Mar 21. 2021

할머니의 시계는 거꾸로 흐른다

할머니와 댕댕이의 은밀한 사생활

치매에 걸리신 할머니는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계신다. 처음에는 당신의 나이를, 주소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리시다가, 이제는 우리를 잊어버리고 계신다. 아빠의 어린 시절로 기억이 회귀되는 경우가 많아서 아빠를 가장 못 알아보신다. 어떤 남자길래 우리 집에 와 있는지 몹시 의아하신 눈치다. 젊으셨을 때부터 단장하지 않으면 문밖을 나서지 않으셨다는데, 그 말씀이 사실인지 아빠 앞에 좀처럼 서지 않으려 하신다. 거울을 보고 요리조리 매무새를 다듬으시다 보면 당신이 왜 그러고 계셨는지 이내 까먹어 버리신다. 결국 정체를 알 수 없는 외간 남자와의 조우 실패!


신기하게도 나랑 동생이랑 엄마는 잘 알아보신다. 때로 컨디션이 안 좋으실 때는 엄마를 집주인이라고 생각하셔서 엄청 예의 바르고 깍듯하게 말씀하신다. 그럴 때면 엄마는 며느리 입장에서 좀 웃기기도 하고, 욕을 하거나 과격한 행동을 하지 않으시는 할머니께 감사하기도 하단다. 물론 동생이나 나를 못 알아보시는 경우는 거의 없고, 손녀딸 대신 친딸로 착각을 하실 때가 많다. 역시 당신이 키워온 손녀들과 쌓은 정은 기억보다 깊게 새겨지나 보다. (그럼 손수 배 아파서 낳고 기른 아빠가 좀 머쓱해지긴 하지만)


가장 미스터리 한 점은 바로 이것이다. 할머니는 일생을 사는 동안 개를 키우신 적이 없다. 분명 할머니의 기억 속에는 개 그림자도 없을 터인데, 신기하게 우리 집 댕댕이를 알아보신다. 알아보는 정도가 아니라 안 보이면 “우리 강새이 어디 갔노? 거기 있노? 우리 강새이 밥 줘라.”라고 하며 찾으신다. 분명 최근의 기억부터 없어진다고 하는데, 강새이만큼은 예외인가 보다. 이제 같이 산 지 7년 남짓 되었는데 30년을 넘게 산 우리보다, 무려 60년을 넘게 산 아빠보다 선명하게 인지하시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런 댕댕이도 할머니의 마음을 아는 걸까? 사람한테 먼저 가서 치대는 녀석이 아닌데 (항상 사람 손이 닿지 않을 거리에 자리를 잡는 시니컬한 댕댕이다) 따땃하게 햇볕이 드는 창가에 앉아 계시는 할머니 무릎을 베고 곧잘 누워있다. 엄마가 식사하시라고 부르면 할머니 방으로 냅다 달려가 평소보다 크고 앙칼진 소리로 짖는다. 할머니는 귀가 어두워서 보통 우리 말은 잘 못 들으시는데, 댕댕이의 크고 우렁찬 울음소리는 잘 들리시나 보다. 그제야 식사를 하러 식탁으로 느릿느릿 걸어 나오신다. 


할머니와 댕댕이 사이에는 모종의 무언가가 있다. 둘만의 은밀한 우주가 있는지도 모른다. 집에서 조그만 물건들이 사라질 때마다 할머니 방이나 강새이집에서 나오는 경우가 태반이니까. 분명 둘은 같은 취향과 취미를 공유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래서 할머니의 관심도 순위에서 우리 식구들은 쪼매난 강새이한테 제대로 밀렸다. 우리 밥은 안 챙겨도 강새이 밥은 챙기시고, 할머니 간식을 우리는 안 주셔도 (예전과 다르게 절대 안 나눠주신다) 강새이랑은 빵 쪼가리까지 나눠 드시니 말이다. 날로 작아지고 있는 할머니의 세계에서 우리를 기억할 자리는 없어도 강새이를 기억할 자리는 있다. 조금은 질투 쌤이 나지만 참아야겠다. 마지막까지 강새이 덕분에 우리 집과 우리 가족을 낯설게만 느끼시진 않을 테니까.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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