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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여자#23] 무좀 커밍아웃

당신의 유전자는 안녕하신지요?

by 꼰대 언니

여름이 왔다.

지난겨울 싱가포르 여행에서 세일가로 장만한 고급스러운 가죽의 핏플랍 쪼리를 꺼내 신었다.

왜인지, 오른쪽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가 간질간질하다. 새 신발이 그렇지 싶었는데, 며칠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는다.


어제는 맘먹고, 안경 쓰고 들여다보니 1번과 2번 발가락사이 하얀 각질이 일어나 있다.

GPT에 물어보니 무좀이라는구나.


수십 년 전, 엄마가 발가락 양말을 사 오던 날이 기억에 선명하다.

왜 어른들은 저렇게 우스꽝스러운 양말을 신나 싶었는데, 이제야 알겠다.

이 모기 앞발로 긁히는 듯한 미세하고 투명한 간지러움이 얼마나 성가신지를.


초록 검색창에 무좀약을 입력하면서 문득 웃음이 났다.

엄마의 작은 코, 도톰한 손등, 곧게 뻗어 매끈하지만 살집 있는 손가락, 노란 끼가 있는 흰 피부, 근육형 살집..

고스란히 물려받았지만, 기억하지 못하던 이런 성가신 것까지 패키지로 함께 왔다고 생각하니 유전자라는 게 참 신기하다. 세포에 인쇄된 작디작은 정보들이 오십년 넘게 참고 기다리다 끝내 발현하여 지금 내 발가락 사이를 간지럽히고 있다니.

(아마도, 몇주 전 비오는 토요일 참가한 마라톤 대회에서 10km 뛴 날, 오래토록 기다린 이 무좀 유전자는 짠하고 발현한 듯하다)


덕분에 오늘, 간질거리는 발가락 사이에서 엄마를 만난다.

이상하게도 이제부터, 가려움을 참을 수 있다. 그리움과 맞바꿨다.


엄마. 나 이제 오십이 넘어 당신처럼 발가락을 긁적이며 살아갑니다.

사람이 죽어도 그 원자는 영원히 남아 곁에 존재한다는 어느 물리학자의 위로처럼,

함께해서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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