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가 밥 먹여줄지도 모르지만
말레이시아에서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속도’를 빼놓을 수는 없겠다. 물론 말레이시아보다 더 느긋한 나라들도 있을 수 있고, 말레이시아에서의 삶이 한국에서의 도시의 삶보다 무조건 느리기만 하다고 볼 수도 없다. 또한 다문화 다민족 국가인 만큼 모든 특성이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는 법. 그럼에도 속도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우선 나는 한국에서 몇 곳의 회사에 다니면서, 속도가 중요한 마케팅 분야, IT 분야에서 일을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쩐지 회사와 내가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분야의 문제라기보다 내적으로 열의가 생기는 일이 아니었던 것도 크지만, 속도에 치여 번아웃이 와서 쉬고 싶다고 느낀 적이 많았다. 그런 내가 말레이시아에서 자유여행 갔을 때뿐 아니라, 말레이시아에서 거주하면서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일할 때도 한국보다 상사와 좀 더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였고, 일상생활을 할 때도 조금이라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태도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여유가 조금은 더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들이 내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문득 몇 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우산을 갖고 오지 않았다. 우산을 파는 곳도, 우산을 빌릴 곳도 찾기 쉬운, 도심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래도 짜증이 조금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왜 일기예보를 안 봤지, 귀찮게 됐네, 하고. 그러나 말레이시아에서는, 우산을 갖고 오지 않은 사람들이, 우산을 사거나 빌리는 방법 외에도, 비가 그칠 때까지 여유롭게 기다리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방법을 택하는 경우를 자주 봤다. 날씨를 원망하거나 괜히 짜증 내는 모습은,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내가 놀란 눈으로 비 오는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볼 때, 말레이시아의 친구가 해 줬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비가 오면 그칠 때까지 기다리면 돼. 언젠가는 그치거든, 말레이시아의 비는.’
실제로 말레이시아는 스콜성 강우가 종종 쏟아진다. 건기와 우기로 크게 구분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건기에도 종종 비가 오니까. 하지만 그렇게 퍼붓던 비도 씻은 듯이 그치곤 했고, 우산을 허겁지겁 찾거나 빌리려고 허둥대지 않아도 됐다. 얼른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우산을 마련하고 나면, 얼마간의 시간이 절약될 수는 있겠지만, 시간의 효율성 대신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곤 했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에게는 그 여유가 있었다. 갑자기 쏟아진 감정의 폭우도 시간이 지나면 갤 것이고, 때로는 비를 맞으면서 돌아가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실제로 속도와 효율성은 회사에서 말 그대로 밥을 먹여준다. 월급을 지탱하는 업무 속도와 성과는 언제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조금은 그 짐을, 속도라는 짐을 내려놓고 일상을 향유할 수 있는, 작은 부분에 마음을 덜 쓸 수 있는 여유가 있는 말레이시아에서, 나는 밭은 숨 대신 깊은 복식호흡을 하며 비 오는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