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게 배려했던 건 아닐까
‘배려’는 삶에 꼭 필요한 미덕이다.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 사회이니만큼, 남들의 입장도 고려하며 서로 어우러져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만 이 배려도, 어디까지나 고유의 존재를 지우지 않는 선에서 작동해야만 진정한 배려가 되는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나,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배제하고, 의무적으로 희생하고 배려하는 것이 반복되면 자신의 존재를 자발적/비자발적으로 지우게 된다. 그러면 즐거운 마음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게 되고 배려가 답답한 족쇄처럼 작용하는 순간이 온다.
나는 한국에서 눈치를 많이 보고, 배려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노력하는 것과 효과적으로 타인을 적시에 배려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지만. 적어도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덕목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이면에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타인을 배려하고 조화롭게 살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조직에서, 사회에서 배제될까 봐 두려웠던 거였다.
말레이시아에서 나는 ‘배려’에 대한 정의를 새로 내렸다. 기존에 사적인 교우관계 외에, 조직이나 사회생활하면서 마주하는 상황에서 필요한 배려는, 암묵적인 룰을 전제로 한다고 생각했다. 상사에게 업무 관련하여 너무 돌직구로 이야기하면 안 되며, 나 자신의 개인적인 특성에 대해 사회생활에서 노출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는 식으로, 외부적인 그리고 개인적인 룰에 의해 행동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에서는 달랐다. 다음 장에서도 이야기하겠지만, 상사에게 업무 관련하여 할 말이나 제언이 있으면 이를 일목요연하게 전달해야 했다. 오히려 말을 안 하고 참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이는 무례함과는 달랐다. 본인 생각에 이러한 부분이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이를 전달하면 되며, 이에 대해 상사가 ‘어디서 감히’라는 뉘앙스를 주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물론 세상은 넓고 다양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단정 지을 수 없지만, 타인이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하고 배려하다가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배려의 개념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물론 문화가 다르다 보니 사적인 인간관계에서 농담하는 코드나 대화 방식이 조금 다르긴 했다. 우선 내가 거주했던 사바 쪽 사람들은 프렌들리한 느낌이 강했으며, 외지인인 나에게도 매우 친절하고 편안하게 대해주었다. 대화할 때 서로 유머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 어떤 유머는 한국에서 통용되지 않는 방식이었지만, 대화할 때 매우 진지한 느낌으로 항시 대화를 이어나가기보다는, 재미있게 유머를 섞어가며 친숙해지는 대화 방식이었다. 이웃집에 놀러 가서 스피커로 음악을 틀고 노래방 타임을 즐기던 어느 날, 집 마당에 키우는 5마리의 개들이 나란히 앉아서 노래하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 모습에 ‘anjing peminat’ (열혈팬 강아지들) 이라며 한참을 같이 웃을 수 있는, 때로는 아이같이 순수하다는 느낌이 드는 대화의 시간이 있었다.
이외에도 너무 벽을 세우기보다는 서로를 진솔하게 표현하며 알아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간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하며, 진중하게 살아오느라, 두려움을 기반으로 남을 배려하느라, 편안한 소통과 유머를, 그리고 내 존재를,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를, 잊고 살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말레이시아에서 살면서 나도 조금씩 유머가 늘었고, 내 생각을 부드럽게 표현하는 경우가 늘었다. 그간 대내외적으로 대체로 감추고 살았던 내 일부분을, 말레이시아에서 꺼내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