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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남은 흉터, 삶의 흔적이었다

팔 봉합 수술을 겪으며 돌아본 상처와 시간의 의미를 돌아본다

by 김종섭

12일 전, 팔에 상처를 입고 봉합 수술을 받았다. 의자에서 떨어지며 유리와 강하게 부딪힌 탓인지 아직도 팔 뒤꿈치에는 타박상이 남아 있다. 다행히 봉합 부위는 잘 아물고 있지만, 매일 붕대를 풀고 연고를 바를 때마다 꿰맨 자국을 보면 ‘조금 더 정성스럽게 꿰맬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먼저 든다.

아침마다 아내가 붕대를 감아주면서 말한다.
“좀 예쁘게 꿰매주지, 어찌 저렇게 무식하게 보일 정도로 살을 꾸몄는지 모르겠네요.” 오늘 아침, 아내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에서는 봉합이 필요한 상처는 외과보다는 성형외과에 가서 치료받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성형외과는 단순히 상처를 봉합하는 것을 넘어, 흉터를 최소화하고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데 중점을 둔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응급실 상황이었고, 급한 치료가 우선이었다. 선택권이 있었다 해도 가정의 소견서와 함께 스페셜리스트를 만나려면 몇 달씩 기다려야 하기에, 상처처럼 즉시 치료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이야기이다.

이번이 내 인생 세 번째 살을 꿰매는 경험을 했다. 두 번은 모두 얼굴에 있었고, 하나는 이마와 머리 경계선 부위, 다른 하나는 눈썹 속에 감춰져 있어 흔적조차 찾기 힘들 정도다. 다행히 눈에 잘 띄는 부분임에도 잘 띄지 않는 곳이라 지금껏 흉터를 의식하며 살지는 않았다. 이번 상처는 그중에서도 가장 큰 봉합 치료였고, 다행히 팔꿈치 부위라 외모상으로 큰 지장은 없다. 하지만 만약 얼굴이나 목처럼 눈에 띄는 부위였다면, 신체적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깊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외모에서 첫인상을 받는다. 얼굴이나 팔처럼 드러나는 부위에 상처나 흉터가 있으면, 마주하는 이가 괜한 선입견을 갖기 쉽다. ‘혹시 싸우다 생긴 상처인가?’ 하는 오해가 자연스럽게 따라붙기도 한다. 꿰맨 자국이 보이기 전에, 먼저 칼을 떠올리며 칼자국을 연상하게 된다.

실밥은 아직 제거하지 않았지만, 팔꿈치에 가까운 부위라 평소에는 가릴 수 있다. 지금껏 큰 흉터 없이 살아온 것도 어쩌면 ‘복’이었고, 스스로를 잘 관리해 온 덕이었는지도 모른다. 상처 부위를 바라보며, 나 자신을 조용히 칭찬하고 위로해 본다.

어릴 적 장난기 많고 짓궂었던 아이들은 자잘한 상처를 많이 남기기 마련이다. 그런 상처들을 바라보다 보면, 자연스레 그 사람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곤 한다. 흉터는 단순한 흔적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나온 시간과 성향, 때로는 아픔마저도 담겨 있는 삶의 자취일지도 모른다.



상처를 바라보며 문득 생각한다.
자신의 입장에서 이해하려 하면 세상에는 곤란하거나 피할 일이 줄어든다. 의사 역시 ‘타인의 살’이 아닌 ‘자신의 살’이라는 마음으로 진료를 했다면, 좀 더 세심한 배려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옷으로 가릴 수 있고, 정면에서 상대의 눈에 띄지 않기에, 이것만으로도 큰 상처를 비켜간 행운이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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