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 없이 지내는 캐나다 여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국의 여름
6월 말부터 여름이 서서히 기지개를 켰다. 캐나다 밴쿠버의 낮 기온은 26도를 넘나들더니, 7월 첫 주에 어느 날은 30도까지 다 닿았다. 해가 쨍쨍하기보다는 뜨거움으로 느껴진 일주일이었다. 햇살은 강했지만 이상하게도 선풍기 없이도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다만 간혹 더운 느낌이 들 때엔 선풍기를 간헐적으로 켰다.
우리 집 창고 안에는 이동식 에어컨이 두 대나 있다. 몇 해 전, 에어컨 없이 더위를 버티기 어려웠던 여름에 결국 구입했다. 상자를 여는 순간은 마치 여름을 맞이하는 의식 같았다. 창문에 환기 호스를 연결하고 위치를 맞추는 일이 번거롭게 느껴졌지만, 해마다 반복하면서 익숙해졌다.
지금 우리 집엔 한 방에만 이동식 에어컨을 설치해 두었고, 아직까지는 가동하지 않았다. 대신 선풍기만 가끔 가동하면서 여름을 보내는 중이다.
2021년 브리티시컬럼비아의 기록적인 폭염 이후 에어컨을 설치하는 가정이 부쩍 늘어났다. 여전히 많은 이들은 ‘참을 수 있을 만큼의 더위’에는 에어컨보다는 자연 바람과 선풍기를 택한다.
요즘 거리의 옷차림도 확연히 달라졌다. 반바지에 샌들, 민소매에 선글라스를 쓴 이들이 커피 한 잔 들고 여유롭게 걷는다. 짧은 옷 사이사이엔 속살보다는 타투의 정교함이 돋보였다. 이들은 계절을 기다렸다는 듯, 자기표현이 당당해 보였다. 나는 몇 달 전 팔 부위에 사고로 인해 봉합 수술을 받아 긴팔 옷으로 가리고 다니는 것과는 대조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이런 풍경이 더 강하게 다가왔다. 사실 타투는 조폭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내게는 여전히 낯설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의 흐름이 바뀌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은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오전부터 비가 내렸고, 기온은 16도까지 떨어졌다. 봄이나 초겨울에 가까운 온도다. 거리엔 두터운 재킷이나 후드티, 모자 달린 점퍼를 입은 사람들이 제법 눈에 많이 들어온다. 여름이라 해도 체감 온도에 따라 즉각 옷을 바꾸는 이곳 사람들의 습관은 어느덧 나에게도 자연스러워졌다.
나도 오늘은 도서관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차 안에서 창문 밖을 바라보며 비 내리는 풍경을 모처럼 즐기고 있다. 선선한 바람과 빗소리, 잿빛 하늘이 주는 서늘함이 오히려 이곳 사람들에게는 자연이 선물한 ‘피서 이벤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에게 작년 여름은 또 달랐다. 7개월 동안 한국에 머무르며 7월부터 9월까지 서울의 여름을 오랜만에 경험했다. 밴쿠버로 돌아가기 전날인 9월 24일까지도 무더위는 계속됐다. 서울의 여름은 덥고 무엇보다 습했다. 기온은 35도를 넘나들었고, 밤에도 28도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 드물었다.
틈만 나면 샤워를 해도 금세 끈적였고, 외출 후 돌아오면 옷이 등에 착 들러붙었다. 여름 초에 산 티셔츠는 탈색되었고, 최근 옷 정리를 하다 그 티를 보며 그 여름을 다시 떠올렸다.
그해 여름, 나는 평생 가장 자주 백화점을 드나들었다. 이유는 단 하나,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시원한 카페로 도망치듯 들어간 날도 많았고, 때로는 근교 탄천 쪽으로 피신하듯 향하기도 했다. 뉴스에서는 매일 폭염주의보가 방송됐고, 거리에서는 얼음 생수, 부채, 쿨매트를 나눠주는 풍경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여름을 살아내는 방식은 참 다르다.
한국에서는 “어디로 피할까”가 중요하다면, 캐나다에서는 “어떻게 견딜까”가 더 중심이다. 나는 햇살이 강한 날이면 일단 커튼을 친다. 습기가 거의 없는 이곳에선 선풍기 바람만으로도 충분히 여름을 견딜 수 있다.
밤이 되면 기온이 20도 이하로 떨어지기도 하고, 이불을 덮지 않으면 추운 날도 많다. 때로는 도톰한 겨울 이불을 꺼내 덮는 일도 있다. 우리 집은 그래서 사계절용 이불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는다.
물론 캐나다도 예전과 같지는 않다. 2021년의 폭염 이후, 에어컨을 설치한 가정이 눈에 띄게 늘었고, 신축 아파트에는 냉방 장치가 기본 옵션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금 불편해도 참을 수 있다”는 문화는 남아 있다. 불쾌지수보다는 ‘견딜 수 있는지’가 기준이 되는 사회. 그런 곳에서 나는 여름을 견디고 있다.
여름이 깊어간다. 선풍기 날개 소리가 낮게 울리고, 아이스커피에 얼음이 반 이상을 채우고 있다. 창고 속 이동식 에어컨은 여전히 꺼내지 않은 채 놓여 있다. 언젠가 꺼내야 할 날이 오겠지만, 오늘은 조금 더 참아본다.
그렇게 참다 보면, 어느 날 저녁 바람이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순간, 여름은 그렇게 바람이 지나간 자리처럼 유유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