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엘리베이터에 닫힘 버튼이 없다

‘빨리빨리’에 익숙했던 몸이 기다림을 배워가는 시간

by 김종섭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늘 눌러왔던 ‘닫힘(Close)’ 버튼이 없었다.


캐나다에 이민 온 지 몇 달, 이곳에선 대부분의 엘리베이터에 닫힘 버튼이 없거나 작동하지 않는다. 장애인이나 노약자가 안전하게 탑승할 수 있도록, 문은 일정 시간 자동으로 열려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엘리베이터 버튼 패널. 열림(Open) 버튼은 있지만 닫힘(Close) 버튼은 보이지 않는다. 장애인 보호와 배려를 위한 설계가 적용돼 있다.

살고 있는 아파트는 지상 3층, 지하 1층 구조다. 아주 높은 건물은 아니지만 엘리베이터를 자주 이용하게 된다. 그런데 아직도 습관처럼 열림 버튼을 누르고는 문이 닫히기를 기다리는 일이 있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한국식 일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누르지 않으면 닫히지 않을 것 같고, 몇 초 더 기다리는 것조차 어색하고 초조하다.


그 몇 초의 기다림이 반복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왜 이렇게 급할까?’

문득 그런 질문이 떠올랐다.


엘리베이터만의 일은 아니다.


캐나다에서는 건물 출입문을 열고 뒤따라오는 사람을 기다려주는 장면이 자연스럽다. 잠시 멈춰 문을 잡고 서 있는 사람, 고개를 끄덕이며 “Thank you”를 주고받는 짧은 시간. 그것이 일상의 일부처럼 흘러간다.


하지만 문이 닫히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먼저 들어가는 모습도 간혹 보인다. 유심히 보면 그런 경우 대부분은 한국인이나 아시안계 이민자들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에서 내게 문을 잡아준 사람은 드물었다. 나 역시 뒤따라오는 누군가를 위한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건 성격이나 인성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가 허락한 속도와 문화, 구조 속에서 몸이 길들여진 탓이다.


길을 건널 때도 마찬가지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 앞에 서면, 차들은 멈춰 선다. 보행자가 먼저 길을 건넌다는 이유만으로 차량이 기다려주는 모습이 처음엔 낯설었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걷는 사람이 우선이라는 감각이 몸에 스며든다. 자연스럽게 먼저 발을 내딛게 되고, 차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차가 나를 기다리는 게 익숙해졌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갔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법적으로는 ‘보행자 우선’이지만, 실제 분위기는 다르다.


이곳에서 길을 건너던 습관 그대로 한국의 비보호 횡단보도를 살피지 않고 건넌 적이 있었다. 차가 멈출 거라 기대했던 내가 틀렸다.


그 행동은 단순한 부주의라기보다, 일종의 심리적 반작용이었다. 보행자로서 존중받지 못했던 사회에서, 뒤늦게나마 권리를 되찾고 싶은 마음이다.


나도 차를 피해 달아난 적이 있고, 운전자의 거친 경적과 날 선 시선을 받은 적도 있다.


차선 문화도 기억에 남는다. 이곳 도로에선 줄이 아무리 길어도 차선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 눈앞에 빈 차선이 있어도 그냥 기다린다.


처음엔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이유를 조금씩 알게 됐다. 줄을 지킨다는 건 결국, 전체 흐름을 더 부드럽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다.


나도 가끔은 한국처럼 빠른 차선으로 바꾸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그러나 그 선택이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한 번쯤은 생각하게 됐다.


닫힘 버튼 하나 없는 엘리베이터. 문을 잡아주는 아주 짧은 기다림. 차량이 멈춰주는 조용한 배려


그 모든 장면에는 ‘기다림’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느림이 아니라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방식이었다.


‘빠름’보다는 ‘함께’를 선택할 수 있는 사회. 그 사회는 조금 더 따뜻할 수 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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