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앞뜰에서 마주한 고향의 꽃, 무궁화
며칠 전까지 30도를 웃돌던 무더위가 언제 끝날지 몰랐지만, 요즘 밴쿠버의 날씨는 20도 초반으로 선선해졌다. 해가 짧아져 어둠도 쉽게 찾아오는, 성큼 다가온 가을의 예고편 같다.
예전에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숲길을 한참 걷다 돌아와도 아직 환했지만, 요즘은 해가 빨리 져 8시만 되어도 동네가 고요하다. 그래서 산책도 자연스레 집 주변 한 바퀴로 마무리하게 된다. 그렇게 천천히 걷던 어느 날, 뜻밖의 풍경을 만났다.
늘 무심히 지나치던 어느 집 앞마당에 분홍색과 흰색 무궁화꽃이 피어 있었다. 매일 걷던 길인데도 마치 처음 본 듯 신기했다. 사실 밴쿠버의 집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담은 정원으로 가득하다. 예쁜 꽃이 피어 있어도 특별한 감흥 없이 스쳐 지나기 일쑤였다.
그런데 오늘은 그 풍경이 달랐다. 볼품없어 보였던 마른 잔디밭을 지나 현관 앞, 두 그루의 무궁화만은 환하게 서 있었다. 낯선 땅에서 만난 고향의 꽃에 반가움이 앞서 조심스레 사진부터 찍었다. 혹시 집주인이 볼까 싶어, 마치 비밀스러운 약속이라도 하는 듯이 몰래 한 장 담았다.
그 순간, 이전에는 이곳을 수없이 지났지만 무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건 아직 꽃이 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외에서 만난 무궁화는 더 특별했다. 한국에서는 흔히 곁에서 보던 꽃이라 무심했지만, 이곳에서 다시 마주하니 고향을 떠올리게 했다. 낯선 이방의 땅에서 만난 작은 꽃 한 송이가 마음에 파문을 흔들어 놓았다.
문득 생각해 본다. 캐나다에서도 봄이면 벚꽃이 만개한다. 이미 국경을 넘어 대중적인 꽃이 되었지만, 무궁화는 여전히 드물고 그래서 더 귀하다. 마치 낯선 곳에서 우연히 마주친 오랜 친구처럼, 그 존재만으로도 나를 향해 웃어주는 귀한 '귀인'처럼 다가왔다. 평소 한인 수가 많은 곳이라 길에서 한국어를 쓰는 사람을 만나도 별다른 관심 없이 지나치지만, 무궁화는 달랐다.
이 집의 주인이 한국인일까 하는 생각도 잠시 스쳤다. 하지만 정원의 분위기로 보아 외국인일 가능성이 더 커 보였다. 어쩌면 단순히 ‘좋아하는 꽃’ 일 수도 있겠지. 요즘은 반려동물뿐 아니라 반려식물, 반려나무까지 곁에 두고 살아간다. 생명을 가진 존재가 우리에게 위안과 정서적 힘을 주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외로운 존재인 걸까. 그래서 누군가와의 연결을 갈망하고, 그 마음을 꽃과 나무, 동물에게도 나누는 것은 아닐까. 그 집 앞의 무궁화 두 그루도 주인의 각별한 애정을 받는 반려나무일지 모른다.
나 또한 직접 가꿀 수는 없지만, 누군가의 앞뜰에 핀 무궁화를 보며 고향을 떠올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꽃 한 송이에도 마음이 흔들리고 따뜻해지는 건, 우리가 여전히 관계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낯선 이방인의 삶 속에서 만난 무궁화는, 잠시나마 내 외로움을 덜어주는 '반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