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와 고비, 그리고 블랙베리가 이어준 여름 숲의 추억
절기상 입추가 지나고 말복의 시간을 보냈다. 하루의 길이도 점점 짧아지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여름 내내 숲은 짙은 그늘을 드리우며 무더위 속 작은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오늘도 아내와 함께 그 숲 속을 천천히 걸었다.
캐나다에서는 산책이 특별한 일이 아니다. 반려견과 함께 걷는 사람들, 부부가 손을 잡고 걷는 모습, 가족이 함께 숲길을 오르는 풍경은 자연스럽게 일상 속에 스며 있다. 숲은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을 잠시 내려놓게 해주는 든든한 쉼터가 된다.
올여름 초, 나는 숲에서 고사리와 고비를 한 끼 정도 먹을 양만큼 채취해 말려 두었다가 반찬으로 해 먹었다. 고사리와 비슷하게 닮은 고비는 캐나다에서 지인과 산책하며 처음 알게 되었고, 내 생애 처음 맛본 산나물이었으며, 그 부드러운 식감과 향이 인상 깊었다.
신기하게도 여름 초 내내 산책길에서 고사리를 쉽게 발견하기 어려웠다. ‘찾아야지’ 하는 마음이 오히려 시야를 좁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최근,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산책로 곳곳에 고사리가 마치 작은 밭처럼 자라서 눈에 띄기 시작했다.
마치 몸을 숨기기 위해 사람들의 손길을 피하던 듯, 여름 내내 보이지 않던 고사리가 이제는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크게 자란 고사리는 식용으로 먹기에는 질겨졌다. 그 옆에는 늦게 돋아난 어린 고사리가 머리를 웅크린 채 고개를 내밀었다. 계절을 거슬러 뒤늦게 합류한 이 어린 고사리를 보며, 생명의 끈질긴 의지와 자연의 신비로움에 절로 감탄하게 된다.
고향 산천에서도 고사리와 고비는 흔한 산나물이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고사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고 자랐다. 한국에서는 어머니가 산에서 채취해 오신 고사리가 밥상에 올라왔을 뿐, 그 모습을 직접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캐나다에 와서야 숲길에 피어난 고사리를 보고, 직접 채취해 한 끼 식사로 만들어 먹으면서 고사리를 제대로 경험하게 되었다.
고사리는 한국에서만 자라는 식물이 아니다. 하지만 캐나다 숲에서 마주한 고사리는, 어린 시절 고향의 산을 떠올리게 하는 따뜻한 친근함을 준다. 아마도 어머니가 봄마다 산에서 고사리를 뜯어 오시던 모습과 향긋한 맛이 내 기억 속 깊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올여름 캐나다 숲에는 고향의 산처럼 고사리, 고비, 그리고 블랙베리가 함께 자라, 숲길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덕분에 매일 걷는 여름날의 숲은 마치 추억 속 고향의 숲을 다시 걷는 듯, 내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던 기억을 살며시 깨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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