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의 아버지와 한국의 아들, 세대를 넘어 다시 이어진 패션의 감성
어제 오후, 한국에 있는 아들한테서 페이스톡이 왔다. 거의 일주일에 서너 번은 통화를 하는데, 대부분 아들은 출퇴근길 승용차 안에서 통화를 건다. 어제는 유난히 얼굴빛도 밝고 목소리에도 생기가 돌았다.
“며칠 전에 가죽잠바 하나 샀어요.”
그 말이 낯설게 들렸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 가죽잠바라니, 왠지 오래된 단어 같았다. 내 젊은 시절 한창 유행했던 옷이라 오히려 세월이 더 지난 패션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아들은 화면을 돌려 새로 산 잠바를 보여줬다. 검은색 가죽이 은은한 광택을 내며 번쩍였다.
‘옷이 날개’라는 말처럼, 잠바 하나로 아들의 인상이 한결 세련돼 보였다.
그때 옆에서 아내가 말했다.
“요즘 가죽잠바가 다시 유행이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장롱 속 깊이 걸려 있는 내 가죽잠바 한 벌이 떠올랐다.
20년도 훌쩍 지난, 거의 새 옷처럼 남아 있는 가죽잠바였다. 그 시절 꽤 비싼 돈을 주고 샀지만, 몇 번 입지도 못한 채 유행이 지나버렸다. 당시엔 동물보호단체의 비판으로 ‘가죽 패션’이 사라졌던 것도 한몫했다.
몇 해 전 옷장을 정리하다가 한 번 꺼내 입어봤지만, 몸에 너무 몸에 너무 달라붙었다. 버릴까 하다가 비싸게 산 옷이라 아까운 마음에 결국 미련이 남아 다시 장롱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들과 통화하면서 가죽잠바를 입은 모습을 보니, 왠지 다시 꺼내 입고 싶어졌다.
“그래, 한 번 꺼내서 입어볼까.”
옷장을 열고 오래된 가죽잠바를 조심스레 꺼냈다. 세월의 흔적이 조금 묻어 있었지만 형태도 색도 여전히 멀쩡했다. 전신거울 앞에 서서 입어보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버리기엔 아깝고, 입기엔 용기가 필요한 옷’이라면 이번 겨울엔 그냥 입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오늘은 마침 아내의 여권을 찾으러 나가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가죽잠바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여권을 수령한 뒤 바로 옆 맥도널드에서 커피를 마셨다.
“이 옷 어때?” 하고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는 나를 잠시 훑어보더니, “그냥… 괜찮아요.” 명쾌하지 않은 대답이었지만, 그 속엔 여러 의미가 섞여 있었다. 그래서 “사진 한 장만 찍어줘 볼래?”라고 부탁했다.
사진 속 내 모습은 거울에서 본 그대로였다. 멋지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버리지 않고 입어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아내는 “옷장에 가죽옷이 있는 걸 미리 알았으면 아들에게 한번 입어보라고 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아내의 그 말에는 ‘옷 상태가 좋아 아들이 입어도 손색없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유독 가죽잠바를 입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내가 가죽잠바를 입고 있어서 더 눈에 띄었던 걸지도 모른다. 젊은 사람부터 중년, 나이 지긋한 이들까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가죽잠바를 소화하고 있었다.
결국 옷이란 건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다만 나이에 어울리게, 나답게 입는 게 중요할 뿐이다. 장롱 속에 묻혀 있던 가죽잠바 한 벌이 이렇게 다시 내 일상 속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올겨울엔 이 옷을 자주 입고 다녀야겠다. 그리고 다음에 아들이 캐나다에 오면
“이거, 아빠가 젊을 때 입던 옷인데 한번 입어볼래?” 하고 물어보고 싶다. 아빠의 옛날 옷이 아들의 눈에도 멋지게 보일지, 그 반응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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