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마트에서 마주한 '말띠 해', 다시 설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새해 한 달이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다. 엊그제 새해 아침을 연 것 같은데, 우리에게는 '구정'이라는 또 한 번의 새해가 기다리고 있다. 서양의 달력으로는 이미 2026년이 시작되었지만, 우리 마음속엔 진짜 명절인 설날이 남아 있다. 사실 한국인에게 '새해'라는 개념은 늘 묘한 혼동을 동반한다. 1월 1일 양력설(신정)과 음력설(구정)이라는 두 개의 새해 사이에서 우리는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예전 기억을 되짚어보면, 한때 한국 정부는 신정을 새해로 완전히 정착시키기 위해 신정에 3일간의 파격적인 공휴일을 지정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구정은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단 하루만 쉬게 하며 신정을 권장했지만, 결국 조상 대대로 이어온 음력 설의 정서를 꺾지는 못했다. 결국 지금은 구정이 다시 3일을 쉬는 본래의 설 자리를 되찾았지만, 서양의 양력 체계와 우리의 음력 전통 사이에서 느끼는 이 기묘한 '이중 새해'의 감각은 여전히 한국인 특유의 정서이자 관습으로 깊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이곳 캐나다에서 설날은 휴일이 아닌 평범한 평일이다. 한국처럼 나라가 정한 연휴가 아니다 보니, 출근과 일상에 치여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느긋하게 떡국을 끓여 먹을 여건이 되지 않는다. 타국에서 맞이하는 설날은 늘 마음 한구석에 애틋함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이방인의 명절'일뿐이다.
어제는 산책을 다녀오는 길에 아파트 로비에서 옆집 이웃을 만났다. 평소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살갑게 지내던 이웃이라 반갑게 인사했는데, 그는 갑자기 뜬금없이 "중국 새해(Chinese New Year)가 언제냐"라고 물어왔다. 순간 당황한 나와 달리 아내는 익숙한 듯 휴대폰 달력을 확인하고는 "2월 18일 수요일이에요"라고 상냥하게 답해 주었다.
옆집 이웃은 독실한 크리스천인데, 대화 도중 자연스레 무슬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중국 새해와 같은 날짜에 무슬림도 자신들만의 새해를 보낸다며, 똑같은 날짜를 새해라고 부른다는 사실에 신기한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를 떠났다. 이웃이 사라진 뒤 아내에게 "우리가 한국인인 줄 뻔히 알면서 왜 '중국 새해'라고 묻는 걸까?"라며 섭섭하고 불쾌한 내색을 비쳤다. 아내는 캐나다에서는 음력설을 보통 'Chinese New Year'라고 통칭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곳의 보편적인 문화라고 했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그 흐름에 익숙해진 아내와 달리, 나는 이제야 그 씁쓸한 '현지 상식'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된 것이다.
오늘은 외출했다가 집 앞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형 중국 마트인 T&T가 길 옆에 있어 과일을 사기 위해 잠시 들렀다. 매장은 벌써 구정 맞이 상품으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차 있었다.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강렬한 붉은색 선물 상자들이 매장을 가득 메웠다. 천장에는 복(福)을 기원하는 붉은 장식들이 화려하게 매달려 있고, 한쪽 면을 가득 채운 선물 코너는 명절 분위기를 한껏 돋우고 있었다. 신정 연휴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이곳은 벌써 두 번째 새해인 설날을 맞이하느라 생동감이 넘쳐났다.
매장 정면에 크게 적힌 "YEAR OF THE HORSE"라는 문구는 이곳이 본격적인 구정 모드에 돌입했음을 알리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2026년은 병오년(丙午年), 바로 '말띠의 해'이다. 중국인들은 옷부터 시작하여 장식물까지 붉은색을 좋아하고, 그들에게 붉은색은 행운과 번영을 상징하는 영혼의 색과도 같다. 그래서인지 매장 안의 온통 붉은 물결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잠시 중국에 와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특히 올해는 붉은말의 해인만큼, 중국인들에게는 이 붉은색이 그 어느 때보다 더 각별하고 상징적인 의미로 다가오는 듯했다.
한국인으로서 '중국 새해'라는 명칭이 여전히 아쉽게 들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언젠가는 이곳에서도 '음력설(Lunar New Year)'이라는 통합적인 명칭이 더 보편화되길 바라보지만, 결국 새해를 축하하고 가족의 안녕과 복을 빌어주는 마음만큼은 국적을 불문하고 모두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1월 중순, 캐나다의 중국 마트에서 다가올 말띠 해의 뜨거운 기운을 미리 한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비록 이곳에선 평일처럼 고요하게 지나갈 설날일지라도, 마음속엔 붉은말처럼 힘차게 도약하는 새해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