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작은 섬이 하나 있다. 조용히 별빛이 내려앉은 칠흑의 어둠 속에서도주워 담아야 할 별똥의 전설을 기억했다.
밤하늘에 피어오른 짜디짠 바람의 입김에도 내가알 수 없는 섬의 흐느낌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새로운 희망의 외톨이가 되어 온갖 비바람의 굴욕을 묵묵히 지켜낸 저 섬 아직도 내가 찾던 전설은 남아있을까,
옷깃을 여며도 성난 파도를 더는 품을 수가 없었다. 한밤중 외로운 물살의 울음소리마저도아직 알지 못한 까닭은 또 무엇일까,
밀려오고 부서져 가는 파도에도 난 아직 섬의 침묵을 알지 못했다.
저 섬에 내가 서고 나면 마음 끝에 아직도 끝나지 않은 미련이 남아 있을 것이다.
영등포-홍성 무궁화 열차표
핸드폰을 뒤적거리다가 갤러리에서 작년 여행 중에 사용하던 열차표를 찾아냈다. 웬만한 사진자료는 삭제를 했는데 미처 못 보고 지나쳐 버린 듯한 열차표 사진 한 장이 남아 있다. 겨우 일 년이지난 사진이다.
그해 여름도 무더웠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아들과 단둘이었다. 큰아들은 해외 출장 중이었고 집에는 혼자였다. 태양의 뜨거운 온기에 바람은 온통 생명력을 잃어갔다. 바람을 짜내듯 선풍기 날개로 바람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보지만 역부족이다. 가만히 있어도 온몸에 짜증스러운 땀이 맺혀 있다. 그래도 무더위에는 집이 최고이다 싶은 생각으로 위안을 핑계로 인내하고 있을 때쯤 가깝게 지내는 형님으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고 영등포역으로 나갔다.무더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각으로 혹시, 나와 같은 곳을 향해가는 것은 아닐까, 모두의 눈빛은 나를 향하는 듯했다.
기차 좌석표가 없었다. 다행히 입석이라도 허락되어 다행이었다. 비교적 적은 입석 인원이 탑승한 이유 때문인지 좌석 주변 통로는 여유로웠다. 가끔은 기차를 이용해서 출장을 떠날 때가 있었다. 출장지에서 돌아올 때에는 여정이 예정되어 있지 않은 탓에 늘 선택의 여지없이 입석행을 택해야 했다. 그때마다 특별한 것이 없으면 앉아 갈 수 있는 객차 식당칸을 이용했다.
덜컹거리는 객차 사이를 비좁고 식당칸을 향해 종종걸음을 옮겨갔다. 식당칸 중앙 부분은 빈 공간으로 남겨 놓았다 객실 양 옆으로 여럿이 엉덩이만 걸터앉아 갈 수 있을 정도에 기다란 의자만 준비되어 있었고 유일하게 음료수 자판기가전부이다. 오래전에 식당으로 운영해오다가 영업을 중단하고 휴게실로 개조한 듯 한 흔적이 엿보였다. 우려와는 달리한두 여유분의 앉을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 서부역(서울역 뒷대 편 역사)에서 비둘기호를 타고 홍성역에 내렸던 기억이 있다. 벌써 39년 전의 일이 되었다. 예전에 홍성역의 모습은 오간데 없고 낯설었다. 39년의 세월, 다시 생각을 정리하고 인정하려 해도 세월의 간격을 줄일 수가 없다. 잠시 한눈판 사이에 세월이 궤도를 이탈한 것은 아닐까, 18세의 소년은 중년이 훌쩍 넘긴 세월을 붙잡아 보았지만 손이 닿질 않았다.
형님은 형님 친구분과 함께 미리부터 역에 배웅을 나와 계셨다. 집을 떠나는 기분이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것에 설렘이 있고 보는 것마다 새로운 것, 그래서 사람들은 문득 여행을 생각하고 계획 없이 도시를 탈출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농협마트에 들렀다. 먹거리로 풍성하다. 먹는 즐거움 또한 여행지에서의 으뜸이다. 고기를 사고 술을 사고 싱싱한 야채 거리를 준비했다. 읍내에서 차로 10분 정도 벗어나목적하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별장이기엔 명칭이 호화스럽고 아파트라는 이름에 세컨드 하우스(Second house)가 어울린 듯하다.
다음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유명 명소를 찾았다. 도착한 곳은 간월도였다. 육지와 연결되기 전까지는 섬이었다. 외로웠던 섬은 간척 사업으로 인해 육지와 맞닿았다. 하지만, 나는 간월도를 이전의 섬으로 기억해 주었다. 많은 관광객의 발길이 어쩌면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를 섬,
"추억은 사진밖에 남는 것이 없어"라고사람들은 말을 한다. 별것 아닌 듯했던 사진 한 장이 39년의 추억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일 년 전의 추억까지 덤으로 올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