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종섭 Aug 22. 2020

호칭에도 품격이 있다.

나를 아버님이라 불렀다

오늘 도심의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는 총영사관을 방문했다. 코로나로 인해 인터넷 예약 없이는 방문이 허락되지 않아 미리  방문 일정을 잡아 놓았다. 영사관을 가는 길은 앞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장대비가 내렸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이 이런 상황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싶은 원망의 생각이 든다.


도심의 수많은 시멘트 빌딩 숲을  비집고 영사관 빌딩 앞에 도착했다. 빌딩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출입문 앞에 예방객으로 보이는 한국인들이 빌딩 인도 바닥 유도 표시줄에 간격을 맞추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한정된 인원의 시간대 예약이라 여유는 있어 보였다.


오후 1시가 되자 영사관 직원이 비접촉 발열 체크 온도계를 들고 빌딩 출입 밖으로 나왔다. 방문자 확인과 동시에 발열 체크가 이루어졌다. 이상 유무를 끝내고 시간 간격을 두고 두 명씩 제한을 두고 엘리베이터를 통해 사관 민원실 보냈다. 예전 같으면 고 넘쳐나는 민원실은 마치 사이버 게임에서 생존에 돌아온 몇 명 안 되는 용사가 개선하는 장소 같은 현실성 없는 상상을 순간 가져보았다. 줄을 서는 일은 생명에 띠를 이어가는 과정처럼 모든 것이 자유롭지 않은 위태로운 일상의 변화가 분명 맞다. 언제 이 상황이 끝날지 기약 없는 시간의 야속함에 괜한 한숨만 나온다


아버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주변을 둘러봐도 모두가 젊은 친구분들뿐 나이 먹은 아저씨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나하나뿐이 없었다. 고객님 내지는 선생님이란 호칭이 세련미 있고 좋을 법 한데 아버님이라는 말에 왠지 낯설고 서먹해진다.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작성해온 서류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아버님 이곳에 날짜가 빠진 것이 있습니다" "아버님 이곳에 사인을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 모든 순간들아버님 콘셉트(concept)이다. 


"아버님이란"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이라고 알고 있는데 사전적인 의미가 달리 표현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전을 펴 들었다. 별다른 뜻 없이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아버지라는 호칭은 가정 내에서 직접 이해관계가 있는 자식들이 부르는 호칭이다.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호칭할 때 주로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쓴다. 자식이 어렸을 때에는 대부분 아빠라는 호칭을 사용했고 성인이 되면서 차츰 아버지. 아버님의 호칭으로 불러지는 변화를 가져왔다.  아들은 아직도 아빠라고 호칭을 하지만 아버지의 존재를 상대방에게 알릴 때에는 "저희 아빠가 아니라 저희 아버지가"라는 호칭을 쓰고 있다. 이 또한 각기 다른 성향의 차이점을 염두에 둔 것일 수가 있다.


『한국 가족 연구』에 실린 ‘친족호칭 일람표에는 간접적으로 지칭하는 아버지라는 호칭은 아버지·아버님·아비·아범·아비·어른·집의어른·어르신네·부(父)·부친을 비롯해서 무려 39개의 종류가 나타나 있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도 호칭들은 다양하다. 식당에 가면 아줌마라는 호칭이 사라졌다. 예전 아줌마라는 호칭은 왠지 천박함과 노예근성 같은 이미지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요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모님. 또는 성별 개념 없이 언니라고 부르는 호칭의 변화를 가져왔다. 좀 더 식당 종업원에게 예의를 갖춘다면 모두가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노동의 현장에서는 이 씨, 김 씨. 이름은 실종되고 성만 남는다. 누군가는 친근감이 있을 것 같아도 천박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직장은 계급이 있어 다행히 직급을 불러주고 직급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름을 불러주지만 나이에 민감하여 이름을 부르지 못할 상황에는 형님. 선배님이라는 호칭이 일반적이다.


여성의 경우에는 결혼을 하는 순간 성과 이름 대신에 누구 엄마라는 이름이 불러졌다.


특히, 모르는 사람들 간에는 아저씨, 아줌마로 불러지고 자영업 하는 주인들에게는 사장님 사모님 이상 넘쳐나는 또 다른 예우의 호칭은 없었다. 그마저도 연륜의 차이를 알지 못할 경우에는 저기요라는 호칭이 또한 일반적이다.


아직도 호칭을 이름으로 불러주는 일이 익숙하지 않다. 남녀. 남자와 여자. 남성과 여성이라는 남녀의 호칭도 상황에 따라 그 뜻의 묘한 존엄성 같은 것이 숨어 있다."어~아~"의 말 끝에  따라 달라지는 한국말은 늘 조심스럽고 어렵다는 것을 종종 실감한다.


한국 사회의 호칭은 외국인과는 달리 애매모호할 때가 있다. 나이의 차이에 따라 호칭이 명확히 구분되어 부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외국 문화의 호칭 관계는 아버지에게도 이름을 불러주었고 장인 어르신에게도 이름을 불러주었다. 어찌 보면 그들에게는 친근한 호칭일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는 예로부터 유교사상으로 깊이 뿌리내린 전통성이 있어 이해 불가한 일이다. 호칭 문화를 뒤집거나 앞서가기엔 무리수가 있다. 


직장에 아들 나이와 비슷한 직원이 있다. 그는 나에게 형님이라고 부른다. 사실 아버지뻘 정도의 나이가 벌어지면 삼촌 내지는 아저씨라는 호칭이 일반적이고 올바른 호칭이다. 하지만, 아들뻘 되는 친구에게서 형님이라 불러짐이 그다지 불쾌하거나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우리는 앳되어 보이는 연예인을 일컬어 영원한 오빠라고 불렀고 또 불러주길 희망했다. 90세가 훨씬 넘으신 전국 노래자랑 송해 선생님을 기억한다. 그는 나이 어린 출연자를 통해 젊은 오빠라고 자청해서 불러주길 원했다. 물론 웃자고 하는 개그성 트이지만 한편으로젊어지싶은 욕망이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영사관 직원이 호칭한 아버님보다는 선생님 고객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러주었다면 좀 유연하게 접근했는지도 모른다. 오늘 다행히도 "저기요, 아저씨"로 불러지지 않고 아버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러진 것이  한편으로는 다행한 이다.






이전 08화 속옷에도 품격이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