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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섭 Nov 07. 2021

품 안에 자식이 떠나갔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들까지 인정해야 하는 세월의 흐름이 있다

저녁 식사를 하려는 중에 한국에 있는 아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한국은 출근시간 이후의 시간을 이용하다 보면 이미 캐나다는 저녁시간으로 접어든다. 보통 때와 다를 것 없이 비슷한 시간대에 오늘도 아들에게서 어김없이 전화가 다. 전화 내용은 고맙게도 아들 일상생활의 사소한 부분까지 정감 있게 전해온다는 것이다.


어제는 아들이 그동안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새로운 내용의 이야기를 꺼내왔다. 내일쯤에 사무실을 보러 간다는 것이 어제 통화 내용의 전부였다. 다음날 아들은 매물로 나온 여러 형태 사무실을 둘러보고 수시로 카톡을 통해 사진을 보내왔다.


오늘 저녁에 통화 내용이 어제 사무실에 이야기였다. 여러 개의 사무실 중에 교통편과 가격대를 비교하여 괜찮다고 나름 판단된 사무실을 계약했다고 한다. 계약한 사무실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정보와 조건을 알고자 하는 아빠의 질문에 오늘따라 아들은 불편한 간섭 정도로 느껴진 모양이다. 아들은 갑자기 특별한  빼고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은 이제부터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한다. 아들의 행동은 며칠 전부터 변화가 있었다. 매일같이 자연스럽게 하루에 한두 번씩은 안부를 물어오던 통화 횟수가 갑자기 이유 없이 줄어들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고 있던 중에 오늘 새삼스럽게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당산역과 한강 시민공원이 인접해 있는 곳으로 사무실을 계약했다

지금처럼 언젠가는 통화하는  차츰  줄어들 것이라고 이전부터 줄곧 생각은 하고 있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아들 나이쯤이면 자신만의 비밀스러움 같은 것을 간직하고 싶은 나이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자식은 품 안에 자식이라 했다. 부모는 여전히 아직도 자식을 품 안에 품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믿고 있. 물론 착각인지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끝까지 믿고 싶었던 부모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의 생각이 바뀌거나 어떤 결정을 할 때에는 미리 준비된 선전포고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한 이유를 달거나 하는  순식간에 결정하고 변해가는 유형의 사람들을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익히 알고 있다. 어느 날 그와 같은 방법을 가지고 아들에 어느 순간 변해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미리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오늘 아들의 행동이 염두에 두었던 그 상황이었다.


아들과의 전화 통화를 끝내 놓고 속상해하는 나를 보던 아내가 한마디 말을 던진다. 그냥 어떤 이야기든 관심을 집중시켜 토를 달지 말고 무조건 아들이 한 행동을 칭찬하면 될 것 같다고 한다. 특히 자식들은 돈에 대해서도 의외로 예민할 수도 있으니 가급 돈에 관련된 이야기 또한 깊이를 두지 고 대화를 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예전과는 달리 요즘 아내가 하는 말들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대를 얻어가고 있다.


아내는 이미 저녁 식사를 끝낸 남은 음식물들을 주방으로 옮겨가면서 내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펴가기에 바쁜 모습이 력해 보인다.

"준우 아빠! 그냥 이것저것 깊이 신경 쓰지 말고 우리 둘이나 잘 먹고 잘살아요"

아내는 항상 자식들이 서운한 감정을 표출할 때마다 우리 부부를 위로하기 위한 푸념을 담은 고정 멘트이다.

"준우 아빠 그 녀석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자신이 했던 말에 마음이 편치 않아 다시 전화 올 거예요"

나도 아내도 아들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오늘은 왠지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서운함이 밀려온다.


애들이 한참 성장해 때에는 사소한 것 까지도 부모에게 의존하려 했고, 부모는 자식이 원하는 모든 것들을 조건 없이 되도록이면 부족함 없이 채워주려 했다. 이제는 상황이 반전되어 간 것일까,

아니면 이 또한 나이가 들어가는 과정이라 치부해야 할 상황일까, 생각을 뒤돌아보니 이제는 아빠라서 더 이상 자식의 생각을 지배하거나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시기가 된 것 같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물론, 대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세대차가 개입이 되어갔다. 부모가 예전과는 달리 자식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폭을 넓혀 가야 할 상황임을 인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부모는 항상 자식에게 조건 없이 베풀어 주면서도 절대적이길 원하는 모순이 있었다. 이제는 자식과의 생각의 차이를 뛰어넘지 못하는 부분을 지금부턴 부모가 인식해야 하는 적절한 시기를 맞이  것이다.


자식과의 소통이 매끄럽지 않고 이해의 폭이 원활하지 않을 경우에는 혹시 내가 살아온 시간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라는 생각부터 먼저 챙겨나가기 시작했다.


옛날 우리 부모님에게 했던 아빠의 행동을 자식들도 요즘 흡사하게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껴간다. 부모님의 말을 귀 닿아 듣기보다는 말문을 열기도 전에 귀를 닫아 버리려는 행동들이 빈번했었다. 부모의 말이 어떠한 말이든 잔소리쯤으로만 인식을 해 온 것이다. 지금에 와 돌이켜 생각하면 내리사랑의 마음과 생각은 오랜 숙성의 시간을 거쳐야 진정한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진리에 동의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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