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 살면서장례식장을 찾아 조문을해본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연히경험의 부재는 캐나다 현지장례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는지전혀 알 수가 없는상황이다. 하지만, 한인사회장례문화만큼은 한국 장례문화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만을 가지고 있었다.
장모님이 병원에서 영면에 드시던 첫째 날병원 측은 사망한 병실에서 유가족이 고인에게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시간적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유가족 모두는 고인과 충분한오열의추도의 시간을 보내고병원 측관계자의 손에 이끌려 장모님은영안실로홀연히떠나가셨다. 사망과 동시에 빈소가 차려지는한국정서적장례예절과는 달리캐나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고인을영안실로 떠나보내고유가족은각자 집또는 평상시처럼 생업의 현장으로 슬픔을 안고 복귀하는 것이 돌아가신 첫날 유가족의 동선이다.
연도를 마치고 연도에 참여했던 신자분들이 고인의 명복과 유가족의 아픔을 위로하고 있다.
영면 2일째 되던 날한인 성당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연도(천주교의 성인. 성녀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망자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추모의 기도)를 받치는 종교 추모행사를 가졌다. 장모님을 비롯한 처가 대부분의 가족이 세례를 받은 독실한 카토릭신자이다.
영면7일째 되던 날추모관이 마련되어 있는 공원묘지에서 입관예절이 있었다. 한국에서는고인의 염습을 할 경우유가족이 직접 참관한다는 사실과는 달리 캐나다에서는 장례대형업체 단독적으로 자체에서 미리 염습을 끝낸 상태에서 추모관에 관을 안치에 놓고 임관예절만 진행한다. 입관 예절이 시작되면 고인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닫혀있던 관을 개봉해 놓는다. 관이 열리는 순간 장모님은 가족이 미리 준비해 놓았던 한복으로 곱게 차려입으시고 손을 합창한 채로 평온하게 관 안에 누워계셨다.마지막 가는 배웅길에 장모님손을 잡아 드렸다. 핏기 없는 손은 마치 얼음 덩어리처럼 차가우셨다. 그때서야 비롯소 죽음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에 통곡을 하고 말았다.
"장모님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잘 가세요"
마지막 보내는 장모님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그동안 보내온 세월의 무게감에 비해 너무나 가볍고도 짧은 이별의 인사말이 되고 말았다. 유가족의 고별인사가 끝나고 고인에게 장미꽃을 헌화하는 순서로 입관예절이 끝났다. 입관예절이 있던 그날 공교롭게도 밸런타인데이였다.장미꽃은 일 년 중최대의 몸값을 받는 날이기도 하다.
"우리 엄마처럼 밸런타인데이날장미꽃을 많이 받아 본 사람은 없을 것같네요"
아내의 말처럼 밸런타인데이날 장미꽃을 가득 받으시고 떠나가셨다.
영면 8일째 되던 날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는 장례미사가 성당에서 있었다. 장례미사가끝나고 곧바로 전날 입관예절이 있었던 추모관을 마주 보고 있는 화장터로 관이 운구되었다. 고인을 화로에 모시기 전에 천주교 예식을 치렀다. 예식이 끝나고 벽면에 잠겨 있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는 순간 바로 문 앞에 화로가 붉게 타오르고 있었었다. 유가족의 통곡과 함께 장모님의 육신은 그렇게 허망하게 가족 곁에서 영원히떠나 버리셨다. 화장터까지 함께 동행하면서 슬픔을 함께 하신 지인들을 위한 답례로 근교 한인 식당을 예약해서 식사를 대접하는순서로 하루 장례예식 일정을 마무리했다.
유골함이 생각지도 못했던 종이 상자에 담겨 유가족에게 인도 되었다.유골함이 납골함에 안치되면 전면을 대리석으로 밀봉한다.
이틀 후인 영면 10일째 날봉안식이 있었다.화장터에서유골함이 유가족에게 인도되고 근교에 마련된 장모님을 안치할 납골당에서 봉안예절 의식을 끝으로 모든 장례절차가 완전히 끝이 났다. 이와는 달리 종교가 없는 유가족의 경우는 가족 중심으로 장례 절차가 간소화되었을 것이다. 특히 조사의 경우 조부모와 부모상에도 직장 내 특별한 휴가의 목적은 주어지지 않았다. 당사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경우 3일 이내의 유급이 아닌 무급 휴가를 얻어낼 수는 있다. 어쩌면 한국정서로서는 이해 불가한 일을 경험하게 되는 셈이다. 다행히 나에게는 한국 직장인 관계로 어느 정도 한국정서에 맞게 3일의 애도의 휴가와 함께 별도의 장례식 날까지 포함하여 4일간의 유급 휴가를 받았다.
묘지 주변에는 새로운 신축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캐나다에는 묘지 주위에 아무런 규제 없이 자연스럽게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다. 공원묘지라는 인식보다는 어쩌면 단순한 공원이라는 인식이 강했는지도 모른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이민 사회에서는 로마법이 여지없이 통용되었다. 장모님의 장례식은 한인사회안에서한인성당이라는 곳에서 치러졌지만, 어쩔 수 없이캐나다 장례 문화에 적응해 갈 수 밖에는 없는 아쉬움은 분명 남아있다. 이민사회에서 만약 종교가 없거나 종교의식에 의한 장례절차를 밟지 않았다면 가족끼리 외롭게 고인을 떠나보낼 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함께 이별의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종교예절이 있어 외롭지 않게 장모님을 편안하게 보내 드릴 수 있었다. 장례를 위한 절차마다 수고해 주신신부님과 수녀님 그리고 성당 연령회 회원님들, 유가족의 슬픔을 함께 나누어주신 지인분들에게도 장례를 끝내면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