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눈의 온도는 몇 도입니까
보이는 것에 전부인 진실을 믿고 싶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일 것이라고 믿고 지냈던 시대가 있었다. 시대는 점진적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이 좁혀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세상은 기존의 기준을 벗어나 그동안 예상하지 못한 개개인의 성향을 살린 '개성'이라 시대가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눈으로 보이는 존재감의 위력은 개성보다는 우월했다.
보이는 세상은 호기심과 흥미로움에 관심을 가져나가기 시작했다. 여인들의 입술은 각자의 개성 있는 색깔을 입혀갔다. 입술이 유난히 빨갛고 화장이 짙어도 전혀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았다. 과거에는 빨간 립스틱과 짙은 화장은 전형적인 술집 여자들의 대표적인 모습이었다. 그때는 외형적인 모습만으로도 직업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었던 시대였다. 눈의 판단이 어쩌면 보배였던 시대가 맞을 것이다.
공돌이. 공순이라는 비속어가 판치던 시대도 있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상 상급학교를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에 취업한 이들을 공돌이. 공순이라고 불렀다. 그때는 사실 외모만 보아도 공돌이 공순이 티가 났다. 시대적인 패션 감각에 민감하지 못했고, 단순한 노동 환경의 지배만을 받아온 탓에 외모 변신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 제일 큰 이유 중에 하나일 수도 있다. 배고프고 힘들었던 시절임에도 노동 일자리는 넘쳐났지만 노동현장에서의 직업은 환영받지 못하고 직업에 대한 편견은 심했다. 보이는 것에 집중했던 '이목중시'라는 시대상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늙어가는 모습을 눈으로 제일 먼저 확인할 수가 있다. 눈은 한치의 거짓 없이 솔직한 느낌을 전한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자신의 모습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로 가끔 위안을 삼아 보지만 보이는 것들을 인간 삶 속에서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잘 살아온 사람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보이는 것만으로도 나잇값의 보상을 받아갔다. 연륜에는 사람의 내면세계를 어느 정도 살펴갈 수 있는 혜안도 있었다. 눈이 보배라는 내공이 나잇값을 보탠 것이다. 물론 나잇값 하지 못하는 사람도 상당 부분 있다.
인간 삶의 방식과 생각은 갈수록 진화되어 갔다. 자연적으로 보는 눈까지 까다로워지기 시작했다. 판단을 위해서는 시각적인 판단까지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정직한 눈의 온도가 식어갈 때가 있다."당신의 눈의 온도는 얼마입니까"라고 때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가 있다. 물론, 나 자신에게도 예외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