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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Jun 23. 2022

설화

雪華, 2017








한겨울의 눈처럼 하얀 머리와 늘 푸르고 맑은 호수처럼 파란 눈을 가진 제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능력을 가진 존재였다. 눈과 얼음을 다스리고 부리는 능력. 그는 믿는 이에게만 나타나는 눈의 정령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제인에게 가장 큰 능력은, 매일 똑같은 자신의 모습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항상 감사할 줄 아는, 선한 마음이었다.


제인은 외롭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사랑이 아닌 인위적인 열기로 가득 차서 뜨거워져만 갔고, 제인과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가 없었다. 그래서 제인은 누구에게도 다가갈 수 없었다.


“넌 이름이 뭐야?”


그러던 어느 날, 눈 덮인 언덕 사이로 난 길로 걷고 있던 아이를 만난 제인은 몹시도 기뻤다.


“왜 나를 궁금해 하는 거야?”

“난 너랑 친구가 되고 싶어.”

“친구?”

“응.”


아이는 잠시 망설였다.


“나랑 친구가 되면…… 네가 좋을지 모르겠어.”

“무척 좋을 거야. 날아갈 듯 기분이 좋고 행복할 거야. 너랑 친구가 되면 오래오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


그 아이는 검은 머리칼과 심연처럼 깊고 잔잔한 검은 눈동자를 가졌지만, 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아이여서, 분명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제인의 말에 그 아이는 왠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망설이는 기색이었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네 이름은 뭐야?”

“난 제인이야.”

“그래…… 제인, 안녕.”

“응, 안녕. 너는? 너는 이름이 뭐야?”


잠시 고개를 돌려 언덕 너머의 집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아이는 다시 제인을 바라보며 말해주었다.


“내 이름은…… 썸머.


제인은 눈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도 제인을 따라 미소를 지어 보였다. 꽁꽁 싸맨 차림에서 유난히 두드러져 보이는, 자신과 똑 닮은 하얀 얼굴이 차가워 보이는데도 미소를 지으면 햇살처럼 더없이 따듯해보여서 좋았다.  










그 겨울은 유난히 더 추웠다.


제인은 추위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매일 그 아이를 기다리는 것도 즐거웠고, 만나서 함께 놀면 행복해했다. 얇은 나무판자로 썰매를 타고 눈 덮인 언덕을 내려가기도 하고, 마을 어귀에 눈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눈밭에 누워 화창한 햇살을 받으며 얘기를 나누고, 창살을 가진 팔이 햇살에 빛나는 키 큰 나무들 사이로 숲을 거닐곤 했다. 마을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나는 여기가 무척 좋아. 그래서 여기서 아주 오래오래 살 거야.”

“그래? 뭐가 그렇게 좋은데?”

“사람들도 다 좋은 사람들이라서 보기 좋고, 마을도 변치 않고 늘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이어서 좋아. 특히 눈이 이렇게 많이 내려도 잘 안 녹고 덮여 있어서 기분이 참 좋아.”


썸머는 몸을 조금 떨었다.


“넌 추위를 잘 안 타나 봐. 난 조금 추운데…….”

“춥다구? 어떻게?”


춥다는 말에 호기심이 일렁이는 얼굴로 눈을 빛내는 제인을 보고 그 아이는 몸을 웅크리던 것도 잊고 웃었다.


“몸이 추우면 말이야, 막 으슬으슬 떨리고 손이 빨개지잖아.”

“몸이 떨리고 손이 빨개진다구?”

“응.”

“우와. 궁금하다. 보여줄 수 있어?”

“손을?”

“응!”

“너무 추운데…… 알았어. 잠깐만 보여줄게.”


그 아이는 조심스레 한쪽만 장갑을 벗었다. 그 말대로 손끝에서부터 붉어진 손을 본 제인은 신기해하며 두 손으로 그 손을 잡았다.


“정말 신기해! 난 정말 몰랐어. 추우면 손이 빨개지는구나.”

“그래. 봐, 얼굴도 이렇게 빨개져.”

“우와, 정말이네! 네 얼굴 지금 엄청 빨갛네. 코랑 볼이랑 전부 다. 히히.”


빨개진 얼굴을 가리키며 제인은 밝게 웃었다. 썸머는 제인의 웃음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나 그 아이는 제 손을 맞잡은 제인의 손이 차가워서 몸을 떨었다. 그 느낌에 제인은 살며시 손을 떼었다. 그 느낌이 썸머에게 좋지 않은 거라는 걸 직감한 탓이었다.


“미안해.”

“응?”

“너한테 추운 건 좋지 않은 거구나.”

“아니야. 그렇지 않아. 좋아해. 나는 눈 오는 것도 좋고 이렇게 너와 함께 노는 것도 즐거운걸.”

“정말?”

“응. 정말이야.”


썸머는 제인이 제게서 뗀 손을 다시 잡았다. 제인은 차가움을 모르는 것처럼 따듯함도 알지 못했다. 그저 느낌만 알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느껴보니, 이렇게 좋은 줄 알지 못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차가웠던 손과 손이 금세 따듯해졌다. 알 듯 말 듯한 그 오묘한 느낌은 제인의 온몸으로 퍼져나가 그를 사로잡았다. 제인은 춥지 않았지만 제 볼이 따스하게 익는 느낌에 소리 죽여 웃었다.


그런데 썸머는 그렇지 않은지 도리어 더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나는 지금 무지 따듯한데, 너는 안 그래?”

“아니. 나도 지금 따듯해. 너 손이 참 따듯하다.”

“근데 왜 얼굴이 더 빨개져? 아직 얼굴은 많이 추운가 봐. 어떡하지?”


가까이 다가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제인에게, 그 아이는 쑥스러운 듯 미소만 머금을 뿐이었다. 눈 덮인 숲 속에, 따가운 햇살이 창살 같은 나뭇가지들을 수없이 지나 머리에 내려앉았다. 그 아이는 제인이 그 하얀 머리칼 덕에 눈이 내려앉아도 모르고, 푸른 눈 때문에 모든 세상이 푸르고 아름답게 보이는 구나 싶은 생각을 했다. 문득 마주친 눈동자에 제 모습이 비칠 때면 왠지 모를 아픔이 깊숙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걸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우리 다음엔 저기 숲으로 더 들어가 보자.”

“그래. 재밌겠다.”

“내일도 볼 수 있어?”

“아니…… 내일 모레쯤.”

“으응, 그래. 그럼 내일 모레 만나.”


함께 있는 시간들이 너무 좋아서 헤어짐은 더욱 아쉬웠다.


“안녕.”

“안녕!”


제인은 제게서 발길을 돌려 산 어귀로 걸어가는 아이를 지켜보았다. 그 아이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윽고 무거운 기침 소리가 산을 타고 옆 마을까지 넘어갈 정도로 울리는 듯했다. 몇 번이고 기침을 하던 아이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 떠나지 않고 서있던 제인은 방긋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뒤를 돌아 자신을 바라봐준 아이가 고마워서, 멀리서도 좀 더 붉어진 얼굴이 아득하게만 보여도 바라보는 것이 좋아서 기쁜 마음이었다. 그 아이도 제게 장갑 낀 손을 흔들어보였다. 아까 제인과 함께였을 때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제인은 그 아이를 기다리는 일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무료해지기도 했다. 그 아이는 가끔만 제인에게 나타났다. 제인은 그 아이가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몰라도 제게 무척 미안해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괜히 서운한 기분에 그 아이에게 부러 부루퉁한 표정으로 물었다.


“넌 나랑 매일 놀고 싶진 않은 거야?”

“아니야. 널 보는 게 얼마나 좋은데.”

“그런데 왜 이제야 왔어. 얼마나 같이 놀고 싶었는데.”


칭칭 목도리를 두르고 털모자를 눌러쓴 썸머는 장갑 낀 손으로 제인의 머릴 쓰다듬으며 마음을 표현했다.


“늦어서 미안.”

“…….”

“그렇지만 이제라도 왔으니까 마음 풀어주라.”

“정말 나랑 놀고 싶었어?”

“그럼. 엄청 많이. 정말이야.”


제인은 두툼한 장갑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콩콩 뛰는 제 가슴에 폭 감싸 안았다. 따듯함은 닿지 않아도 고스란히 제게 전해져 왔다. 그 아이는 눈웃음만으로도 자신을 밝혀주었다. 문득 제인은 자신이 친구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 아이에게 친구가 되어 달라고 졸랐나 싶었다. 혹시 자신을 귀찮아하지는 않을까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제인의 손을 맞잡아주며 눈을 맞췄다. 어느새 그 선한 눈동자에는 하얀 정경 속의 제인이 담겨 있었다.


“밤새 또 눈이 내렸네. 눈 뜨자마자 창밖을 봤는데 온 세상이 하얘서 좋았어.”

“응, 너무 좋다. 그치?”

“그래. 정말 좋아. 이렇게 아무도 안 밟은 눈을 밟으면, 꼭 내가 아무도 안 가본 곳을 정복한 기분이 들어.”

“난 안 가본 데가 엄청 많은데……. 만약 아무도 안 가본 곳이라면, 거길 가면 어떤 기분일까?”

“지금 눈을 밟으면서 소리를 들어 봐. 그럼 알 수 있을지도 몰라.”


제인은 그 아이의 말 그대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발자국을 하나씩 내딛어 보았다. 푸욱 들어간 발에 힘이 실릴 때 뽀득 소리가 나면서 기분 좋은 느낌도 났다. 그 느낌에 놀란 제인은 신기해하며 맑은 웃음소리를 흩뜨렸다. 옆에서 걷던 아이도 따라서 웃었다.


“정말 신기한 소리가 나네. 난 이런 소리가 나는 줄은 몰랐어.”

“왜?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아본 적 없어?”


그 물음에 제인은 대답을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눈의 정령인지라 눈 위를 걸어도 밟지 않고 다니는 게 암묵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제인은 그 아이가, 자신이 그 아이와 다른 존재라는 걸 알면 어떤 사람들처럼 싫어하든지 무서워하든지, 피하게 되는 것이 싫었다. 처음 마음을 연 친구인데. 처음으로 좋아한 친구인데.


“넌 무척 좋은 애구나. 다른 사람들한테 눈 밟는 걸 양보해준 거지?”


그 아이는 역시나 따듯한 마음이 담긴 눈으로 제인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해주었다. 쑥스러운 듯 미소 지은 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썸머, 고마워.”

“뭐가?”

“내가 몰랐던 많은 것들을 알려줘서 고마워.”

“다들 아는 걸 알려준 건데 뭘.”

“아니야. 이런 것들을 나한테 처음 알려준 건 너야. 그리고 내 친구가 되어줘서 무지 고마워.”


이렇게 같이 있으면 좋은 사이가 친구인 걸까. 아직도 잘 모르지만 아이가 제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웠다. 그리고 항상 머물기만 했을 뿐이지 세심하고 감동적으로 느껴보지 않았던 자연을 다르게 느끼게 해준 아이에게 더 많이 고마웠다.


“나도 네가 내 친구가 되어줘서 정말 고마워.”


제인은 그 아이가 제게 언제나 진심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맞잡은 손의 온기를 다시 한 번 그대로 느껴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 아이의 얼굴이 유난히 붉어져 있는 게 보여서 그럴 수는 없었다. 많이도 추운 모양이었다. 제인은 제 발치의 그림자 옆으로 햇살에 반짝거리며 빛나는 눈을 응시하며 조금 울적해졌다.

춥다는 건 어떤 걸까? 그렇게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느껴지는 추위란 어떤 것일까? 자신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 그 추위를 제가 모조리 가져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자신은 얼마든지 추워도 괜찮으니 그 아이가 추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전보다 조금 파리해진 얼굴에 마른 입술이, 추위란 것이 알 수 없는 고통을 주는 일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제인은 다시 두 손으로 그 아이의 장갑 낀 손을 잡았다. 이렇게라도 함께여서 좋았다.  










겨울이 조금씩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그 아이는 점점 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제인은 몹시도 초조해했다. 겨울이 끝나면 잠이 들어버리는데. 그렇게 되면 그 아이를 만날 수가 없는데. 하루, 이틀, 사흘…… 제인은 죽은 나무 등에 날수를 표시하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친구를 사귀지 말걸 그랬나 보다.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마음이 텅 빈 느낌에 힘이 들고 울적해지지 않았을 텐데. 친구란 건 그런 걸까? 함께 있을 땐 행복하지만 곁에 없을 때면 외롭고 슬픈 기분을 제게 안겨주는 존재일까. 그런 생각에 한없이 가라앉은 제인은 찬물이 잔잔하게 일렁이는 푸른 호수에 몸을 담그고 누운 채로 높디높은 하늘만 바라봤다. 그 하늘은 언제 봐도, 아무리 봐도 좋은 하늘이었다. 하지만 제인은 내내 다른 것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 몸은 그 호수에 폭 담긴 채였지만 마음은 그 아이와 거닐던 눈밭에 가있었다. 호수에 떠다니는 얼음 결정들이 팔과 다리를 스쳤다. 어떤 얇은 결정 하나는 손끝에 닿았다 멀어졌다. 그 때 제인은 문득 따듯함을 느끼고 싶다고 생각했다.


따듯함.

단 한 번도 원하지 않았던 것을 느끼고 싶었다.


“제인.”


하지만 절 부르는 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몸을 일으켜서 그 아이를 눈에 담은 순간, 제인은 푸른 호수의 빛깔로 잔잔하게 물들어있던 얼굴에 웃음을 띨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그냥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었어.”

“같이 보자. 여기 나와서, 나랑 같이 보자.”

“그래. 얼른 갈게.”


그리고 그런 생각에 그 웃음을 제게서 떠나게 할 수가 없었다. 친구를 사귀기를 잘했다고.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 아이를 친구로 사귄 것은 참 좋은 일이라고. 그동안 누구에게도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그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제인은 그 아름다운 호수와 주위의 아름다운 정경과 그 위의 찬란한 해에게, 그 모든 자연에게 감사했다. 그 아이를 제게 나타나게 해준 모든 자연의 섭리와 사랑에 감사했다.


호수에서 나와 바로 그 아이에게 기쁜 마음으로 가려던 제인은, 자신이 다가가자 왠지 움츠러드는 기색을 하는 아이를 보고는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왜 그래?”

“너한테서 너무 한기가 느껴져……. 그래서 가까이 못 가겠어.”

“한기?”

“네가 찬 호수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그럴 거야.”

“아, 그럼 더 추워지는 거구나. 몰랐어. 정말 미안.”

“괜찮아.”

“미안해….”

“아냐, 내가 미안해. 날 기다리고 있던 거지? 많이 기다려서 혹시 지루했어?”

“…….”

“그럼 우리 조금만 떨어져서 걷자. 같이 걷다 보면 햇살이 우릴 따듯하게 해줄 거야.”


제게서 몇 발짝이나 멀어졌지만 아쉬운지 조금씩 자신도 모르게 제게 가까워진 채로 걷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제인은 생각했다. 이미 너로 인해 난 몹시도 따듯하다고. 다른 어떤 것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니 다시는 저 하늘과 해를 바라보지 못한다고 해도 네가 날 보고 그렇게 웃어준다면 행복할 거라고.


햇살이 따듯해질수록 온 마을을 덮은 하얀 눈은 더욱 반짝이며 빛났다. 그 아이가 웃을수록 제인의 마음은 따듯해져 갔다. 제인은 어서 제 몸이 한기가 사라지고 따듯해지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그 손을 잡을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더 따듯해질 텐데.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밟고 지나쳐가면서 제인은 어서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아쉬워졌다. 그 아이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뿐이었다. 제인은 야속함에 뾰로통해진 말투로 슬쩍 말을 떠보았다.


“아직도 내가 다가가면 추워?”

“아까보단 덜 해졌어.”

“그래?”

“응. 그래도 아직 조금 추운데….”


그 아이에게 춥다는 건 뭘까. 어떤 아픔이나 고통을 주는 것일까. 제인은 자신이 그 아이에게 추위를 준다는 것이 그토록 싫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 아이에게서 온기를 받아 따듯해지기만 하는데. 그 아이는 제가 다가가면 춥다고 했다. 그걸 말하지 않아도 붉어진 얼굴이, 작은 물방울이 매달린 눈썹과 털모자 아래로 삐져나온 젖고 헝클어진 머리칼이 보여주었다. 미안함과 함께 속상함이 컸다.


우리는 더 가까워질 수 없을까. 난 언제나 네 손을 잡고 이렇게 함께 눈밭 위를 걷고 싶은데. 햇살을 받으며 걷다보면 너도 나도 따듯해져서, 그 따듯해진 몸과 마음을 함께 다독이면서 더 따듯해질 수 있을 텐데.

속상해하는 제인을 알아챘는지 조심스레 다가온 아이가 손을 잡아주었다. 제인의 얼굴은 금세 밝아졌다. 그 아이는 뿌연 숨결마저도 따듯해서 자신을 웃음 짓게만 만들었다.


“제인.”

“응?”

“넌 말이야. 꼭 천사 같아.”

“천사?”

“응.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처럼 새하얀 날개와 마음을 가진 천사…….”


그 아이는 평소처럼 웃고 있는데도 왠지 서글픈 얼굴이었다. 제인은 꼭 그 미소가 반짝이는 눈밭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 같다고 느꼈다.


“그래서 널 만났으니까 천사를 만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천사를 만나면 뭐가 좋은데?”

“글쎄……. 이젠 바라지 않아.”


잠시 손을 뗀 아이는 장갑을 벗더니 맨손으로 제인의 손을 맞잡았다. 오랜만에 느낀 그 아이의 손은 분명 따듯하리라 생각했지만 무척 차갑고 말라 있었다. 왜일까. 제인은 혹시 자신 때문일까 싶은 미안한 마음에 손을 떼려 했지만, 그 아이는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마치 잡은 손을 영영 놓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다만 다른 바람이 생겼다면…… 널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대신 다른 말을 꺼낸 그 아이에게 제인은, 무슨 말이냐고 물었지만 그에 걸맞은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말없이 맞잡은 손을 호수에 일렁이는 물결처럼 작게 흔들며 걷던 아이는 뿌연 김을 내뱉으며 말했다.


“제인……. 있지, 내가 만약 오래 보이지 않으면, 그렇게 생각해줘. 난 오래 겨울잠을 자.”

“겨울잠? 다람쥐나 반달곰처럼?”

“응. 나는 그런 아이야. 그러니까 기다리지 않아도 돼. 나는 언제 깨어날지 모를 겨울잠을 잘 거야.”

“그래? 근데 겨울은 곧 끝나 가는데…….”

“…….”

“어쩌지? 사실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나는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면 잠을 자. 난 겨울에만 눈을 뜨거든.”

“그렇구나.”

“만약 겨울이 끝나고 내가 잠이 들면…… 내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줄래?”


제인은 왠지 그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계속해서 들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런 마음을 갖지 말라고 이르는 듯 잡은 손을 어루만져주었다. 한 번도 누군가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손에 온기가 가득 전해졌다. 그 손은 조금씩 붉게 물들어 갔다. 그러나 그에 따라 다른 손에서는 온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 기다릴게.”


여전히 그 미소만은 따듯할 뿐이었다. 그 생생한 온기는 아무리 상대에게 전해져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 따듯한 마음은 아무리 나눠져도 그대로이기 때문이었다.


“정말?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데도?”


제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그 아이는 언제나 제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눈을 하고 있었다.


“대신 넌 날 기다리지 않아도 돼.”


제인은 그 아이처럼, 그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보이는 그대로로만 그 아이를 제 눈에 담으며 행복해했다.


“아니야. 나도 널 기다릴 거야. 언제까지든 기다려줄게.”

“괜찮아. 난 항상 널 기다리게 했잖아. 알고 있어. 기다리는 일은 힘든 일이라는 걸. 그러니까 그러지 않아도 돼.”

“그렇지 않아. 널 기다리는 건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

“…….”

“그러니까 언제까지나 기다릴게.”


제인이 분명한 다짐을 담아서 약속했지만, 그 아이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제인은 의아했지만 왜 그러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그 아이는 꼭 처음 다가가서 이름을 주고받았을 때처럼…… 슬퍼 보였다.


그 땐 전혀 슬퍼 보인다고 느껴지지 않았는데. 왜 이제야 그걸 느끼게 되었을까. 이제야 조금씩 그 아이를 알아가게 되는 걸까.


그 날, 그 아이는 유난히도 제인과 함께 많이 걸었다. 넘어가보지도 않았던 산을 넘고 옆 마을까지 둘러보고 온 세상에 밟히지 않은 눈길을 다 밟아보겠다는 것처럼 걷고 또 걸었다. 걸을수록 그 아이의 얼굴은 새파래졌고 입 사이로 나오는 김은 더욱 뿌옇고 뜨거워졌다. 제인은 아이가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힘을 내고 있다는 걸, 알려주지 않아도 느끼고 알 수 있었다. 고마움과 함께 진해지는 미안함에 그 아이의 시선을 제게 붙잡아두고 싶은 걸 따를 수가 없었다. 그저 느려진 발걸음에 맞춰 걷는 것으로, 함께 겨울의 정경을 눈에 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그 아이가 자신을 위해 그 힘겨운 추위를 이겨내려 애쓰고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었으니까.


“제인.”

“응.”

“안녕……. 잘 가.”


먼저 인사말을 건네며 손을 흔드는 아이에게, 제인은 언제나 그렇듯 밝게 웃으며 인사해주었다. 이번에는 묻지 않았다. 우리가 언제 만날 수 있는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그래서 그 아이는 무척 고마운 듯 뭉클해진 눈가를 휘며 웃었다. 돌아서서 가는 그 아이를 위해 제인은 몰아치려던 눈보라를 밀어내었다. 그 아이가 가는 길이 따듯하고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짧다면 짧을 수 있으나 그 어느 때보다도 길게 느껴졌던 잠에서 깨어난 제인은 그 길로 익숙한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그 아이는 어디에 있을까. 처음 그 아이를 만났던 길목을 가고, 함께 거닐던 숲 속에도 가보고, 끝없이 눈밭이 펼쳐진 언덕 평원에도 가보았다.


썸머는 어디에도 없었다. 풀 죽은 제인은 나무 등 위에 걸터앉았다. 그 아이를 기다리던 날 수를 새겨놓곤 했던 나무였다.


“윈터가 그렇게 가고 어머니가 혼자 쓸쓸하게 계시네.”

“그러게 말이에요. 하나 있던 딸이 그렇게 허망하게 가서 어쩔까나.”

“그 애는 원래 몸이 안 좋았다더니 왜 이 추운 동네를 왔던 거래요?”

“여기가 그 엄마 고향이어서 그랬다고 들었어요. 곧 죽을 거란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지요.”

“쯧쯔, 불쌍한 것……. 한창 나이에 꽃도 못 피워보고 새싹이 눈 속에 파묻힌 거나 다름이 없네.”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들어본 적 없는 이름 하나가 귓가를 스쳐갔다. 제인은 아무 감흥도 없이 눈 속에 파묻힌 메마른 나뭇잎들을 헤치고 줄기를 뜯으며 무료해했다.


자신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이름, 그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그래서 그 이름의 주인이 자신을 바라봐주고 그 날들처럼 웃어주기를 바랐다.


썸머. 보고 싶은데 넌 어디에 있어?

난 널 만났던 여기 그 자리에서 계속 널 기다리고 있어.

힘들지 않느냐고? 아니. 하나도 안 힘들어.

그러니까 언제든지 와.


내 친구 썸머.

보고 싶어.


그 겨울의 날들처럼 변함없이 햇살에 반짝이는 눈밭 위로 제인의 눈길은 그 마음속 말들을 편지로 쓰고 있었다. 그 선한 마음 그대로 그 외로운 겨울에도 제인은 감사했다. 그 아이를 만났던 그 겨울이 언제든 제게 오리라 믿고 있었으니까. 그 아이를 만나게 해준 겨울에 감사했다. 온 세상이 하얗게 잠든 겨울에도 그 온기를 간직한 마음은 여전히 따듯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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