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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Jun 23. 2022

두 사람의 길








차분히 볕살이 든다. 타일 깔린 베란다엔 이슬비가 내린다. 그 비는 마음대로 그칠 수 있는 눈물처럼 내린다.


그는 멍하니 물뿌리개를 든 채 창밖에 시선을 내버려 두고 있다.


사실 그밖에도 버려두고 있는 건 너무나 많다.


당장 눈앞에, 아니 발치에 놓여있는 이 수많은 식물들. 그가 이름도 품종도 다 알지 못하는 식물들. 저건 일주일에 한 번씩, 저건 사흘에 한두 번씩, 너무 자주는 말고 적당히 줘야 해. 알지, 적당히. 시키는 대로 하는 일 중 가장 가볍지만 성가신 일을 하면서 ‘적당히’의 적당함이란 어느 정도인가를 가만히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무릇 기만적으로 느껴지고 만다. 야자나무의 길쭉하고 끝이 날카로운 풀잎에 물방울이 맺히고 몇몇은 아래로 톡, 톡, 떨어진다. 그의 발가락 사이와 발등 위로, 서늘하다 못해 건조한 베란다 타일 위로. 타일과 타일 사이로 흙 입자가 섞인 물이 흘러간다.


그는 문득 이 작은 베란다가 제게 유일하게 주어진 세계처럼 느껴진다. 뇌리에 스치는 소스라치는 감각을 느끼며 그는 뒤로 비껴나게 두었던 선인장에 남은 물을 다 부어버린다. 아, 저건 물을 주지 말라고 했는데.


가벼워진 물뿌리개를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베란다를 나온 모현은 탁상에 두었던 차를 마신다. 티백은 힘없이 늘어져 있고 온도는 미지근해져 있다. 한 모금 마시니 씁쓸한 맛이 입안에 감돈다. 그대로, 찻잔도 있던 자리에 내버려 둔 채로, 모현은 소파에 앉는다. 처진 몸을 기대어본다. 이대로 잠들고만 싶은 기분이다.


남편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지만, 딱 하나, 자신이 아끼는 식물들에 물을 주는 것만큼은 부탁한다고 했다.


늘 그런 식이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해도, 결국 이곳엔 내가 해야 할, 나밖에 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일들 뿐이잖아.


모현은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려 집안을 둘러본다. 여기저기 시선을 던지고 움직이며 제 시선이 닿는 곳마다 놓여있는, 아무리 쓸어내도 닦이지 않는 비루한 일상의 더께와 덜어지지 않는 짐 같은 자멸감과 산적된 일거리를 바라본다. 쌓인 빨랫감과 싱크대를 꽉 채운 컵과 그릇들. 거실 상 위에 놓인 온갖 서류와 바닥 여기저기 놓인 잡동사니들. 티비 옆 책장에 꽂혀있는 옛날 씨디와 책들. 앨범들. 고개를 높이 들어야 보이는, 가장 윗칸에 놓인 결혼사진. 이토록 보잘것없는 이성의 낱줄로 겨우 지탱하고 있는 삶의 유일한 증거.


멀미가 나는 듯해 모현은 시선을 거둔다.


이삿짐을 싸야 하는데. 내일 두 시쯤 중개업자와 집 보러올 사람이 들른다고 했는데.


모현은 한숨을 쉬며 소파 위로 눕는다. 담요를 덮고 모로 누운다.


요즘 남편은 매일 밤늦게 귀가하고 있다.


원래도 일 특성상 바쁜 사람인 건 알고 있었지만 갈수록 얼굴 비추는 빈도가 줄어들고 있다. 이러다가는 그 미끈한 낯도 꿈결처럼 흐릿해질 듯하다.


한 해의 끝, 밤이 허기진 수마처럼 하루를 잡아먹을 듯 감싸오는 날들엔 기분도 쉽게 어두워지기 일쑤다.


단지 그런 것이겠지. 사람은 그토록 유약한 법이니까. 모든 주변 환경 요인에 영향을 받고, 끝없이 변화하면서도 그대로인 채로 살아지기도 하는, 아이러니한 존재이니까. 그래서 왜 자신이 이토록 잠만 자고 싶은 기분이 드는지, 쉽게도 우울해지는지, 명백히 밝혀낼 수가 없는 것일까 싶다. 요인이 너무나 많으니까.


남편도 그랬다. 당신 아직 회복기잖아. 좀 더 쉬어야 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거야. 아니면 당신 그 친구 일 때문에 기분이 좀 다운된 걸 수도 있어. 자주 그랬다. 당신은 너무 생각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경향이 있어. 제발 우리 그러지 좀 말자. 그런다고 뭐가 해결돼. 응? 제발 부탁인데 쓸데없는 걱정 늘어놓지 마. 다 잘 될 거야.

그래?

그럼. 아기도 다시 가질 수 있을 거야.

그래?

그렇다니까. 어머니도 슬쩍 얘기하셨는데 글쎄 겪어보신 적 있다더라. 푹 쉬면 금방 낫는다고, 너무 걱정 말라셨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자기야.

그래?

그럼. 다 잘 될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게 잘 되는 거라고 생각해?


그때 묻지 못한 말을 반드시 묻고야 말겠다고, 묻고 싶다고, 모현은 생각한다.


우리, 정말 잘 될까?

잘 된다는 게 대체 뭘까?


모현은 느낀다. 남편과 자신의 세계가 너무도 유리되어있다고. 조금의 교집합도 나눔도 없이.


당신이 하는 그 말들이 나에게도 통하는 걸까?


모현은 훅 꺼지고 늘어진 배를 만져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뱃속에, 제 몸 안에, 한 생명이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물론 두 달밖에 되지 않아 생명이라곤 할 수 없는 작은 세포 덩어리 정도였다지만. 그래도. 그렇게 일찍 끝을 볼 줄은 몰랐다. 원하지 않던 일이었지만, 이왕 시작된 거라면 끝은 아름답기를, 모두가 말하는 그 사랑의 결실과 놀라운 영광을 품에 가득 안을 수 있기를 바랐다.


허나 그날도 모현은 혼자였고, 수술이 끝날 즈음에야 나타난 남편은 모현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뜰 무렵 제 손을 잡은 채 핼쑥한 얼굴로 같은 말만 되풀이했더랬다.


미안해.


모현은 그때처럼 눈을 감았다.


영원히 눈을 감고 싶었다.


몸속에 있던 그 세포 덩어리뿐만 아니라 저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제 의지와 상관없이 빠져나가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몸뚱어리뿐 아니라 제 영혼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홀쭉해진 배를 아무리 어루만져도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때는 그런 말을 믿었다. 이미 꿈을 이룬 사람은 더는 꿈을 꿀 필요가 없다는 말.


더는 아무런 꿈도 꾸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깨우는 손길이 느껴졌다.


모현은 남편이려니 생각하곤 몸을 뒤척이며 등을 돌렸다. 만사가 귀찮을 따름이었다. 그는 자주 서운함을 표했지만 갈수록 그 표현의 발화조차도 줄어가고 있었다. 모현은 남편이 스스로 원해서든 의무적으로든 제게 손을 뻗는 것 자체가 꺼려졌다. 언제 우리가 그토록 가까웠던가. 기이하게 느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시 손길이 느껴졌다. “하지 마.” 모현은 매몰찬 투로 말하고 담요를 이마 위로 덮었다. 하지만 손길은 계속해 저를 깨우려 했다.


화가 난 모현은 담요를 젖히며 상체를 일으켰다.


“왜 이렇게 귀찮게 굴어! 왜!!”


물기 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마른 불씨처럼 튀어나왔다.


한껏 성을 냈건만, 정작 눈앞에 서 있는 건 웬 낯선 이였다.


잠귀가 밝아 남편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잠에서 깨곤 하는지라, 요새는 각방을 쓰기까지 하는 그였다. 한데 저 낯선 사람이 들어오는 소릴 듣지 못했다니 의아한 일이었다. 게다가 저 사람이 대체 어떻게 이 집에 들어왔단 말인가.


도둑이라기엔 인상이 점잖고, 영화에나 나올 법한 국가기관 요원의 부류라기엔 나이가 너무 들어 보였다.


그는 하얗게 센 머리에 삶의 질곡만큼이나 짙은 주름과 얇은 입술을 가진 여자였다. 제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비슷한 나이대였을 거라 짐작되었다. 그는 모현이 저를 관찰하는 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뚝 서 있었다. 외면상 나이대치고는 허리도 꼿꼿하고 아주 바른 자세를 하고 있었다.


왜인지 함부로 말을 걸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분명 제 집에 침입한 사람이건만 어쩐지 차라도 한 잔 하시겠냐고 여쭤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불쑥 찾아와서 놀라셨죠? 먼저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정중한 말투와 함께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에 모현은 놀라서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그런데 대체 누구신데 오밤중에 남의 집을….”


그는 모현의 말에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거실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은 어쩐지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전혀 배회하는 느낌이 없었다. 원하는 것을 바로 찾아내고, 원한다면 알고 싶은 것을 바로 알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배어있는 듯했다.


모현은 그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눈길에 이끌린 듯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모현 씨.”

“네?”


어떻게 제 이름을 아시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말을 이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겠습니까?”


그 무슨 황당무계한 말인지.


모현은 헛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혹시 이거 꿈인가? 모현은 보일러를 켜는 걸 깜빡해 서늘해진 공기가 닿는 팔을 어루만졌다. 이런 감각이 가짜일 리가 없다. 모현은 눈을 깜빡이고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해야 대비를 하든지 할 텐데. 모현은 가슴이 답답하고 내심 불안함을 느꼈다. 반면 그는 아주 초연해 보였다. 그 인상 덕분인지 주어진 시간이 없다던 말 치고는 상당히 느긋해 보이기도 했다.


“다시 묻겠습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실 겁니까?”

“아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건 꿈도 아니고, 환상도 아닙니다. 모현 씨. 시간이 없지만 이성을 차리고 대답해보세요.”


모현은 다시 마른침을 삼켰다. 제게서 눈을 떼지 않는 그의 대담한 눈빛에서 처음 보는 결연한 의지가 보였다. 저런 눈빛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있던가.


모현은 떨리는 손을 주먹 쥔 채로 물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게 가능해서 정말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면…… 다시 돌아올 순 있는 건가요?”


그가 작게 미소 지었다.


“아니오. 한 번 돌아가면 다시는 같은 길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모현은 너무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


그는 ‘길’이라고 말했다.


마치 사람의 삶이 하나의 커다란 나무에서 뻗어나간 나뭇가지들처럼, 숱한 갈래로 이어진 길과 같다고 비유하듯이.


그렇다면, 제 삶에 다른 ‘길’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뜻일까?


모현은 생각했다.


만일 전학을 가지 않았다면, 시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면, 그날 엄마에게 가슴에 품고 갈 수 있는 따듯한 말 한마디라도 할 수 있었다면,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아버지에게 대들지 않았다면, 연락처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면접을 보다가 겁이 나서 뛰쳐나오지 않았다면, 그 회사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곁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그 빌라를 나설 때 엄마의 손을 잡지 않았다면……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길이 너무나 많지 않은가. 누구나 그렇듯, 삶은 무수한 선택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의 선택마다 삶의 양상이 달라진다면, 그런데 그때마다 선택하지 않은 다른 길 또한 펼쳐지고 있는 거라면, 그것은 한 사람의 삶이 우주처럼 광대하다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


모현은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스스로, 혹은 주변 환경과 타의에 의해서 해온 선택들로 지금껏 살아온 삶을, 단 한 번의 선택으로 뒤집을 수 있는 걸까.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요?”


왜인지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 말에 모현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당신도 잘 알잖아요. 중요한 건 오로지 당신의 뜻이에요. 당신이 원하는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에요.”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참으로 현실적인 태도로 전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리어 믿음이 갔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 사람에 대한 믿음보다는,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러고 싶다는 욕망 탓이 더욱 컸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돌아가고 싶어.


그런데, 대체 어디로?


모현은 불안해하면서도, 전과 달리 결연한 낯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앞이 새하얘졌다.

설원의 한가운데 폭풍에 휩싸인 것처럼 감각이 무뎌지고 영혼의 뿌리가 잘게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차마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감각과 지남력의 상실이었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잃는다기보다는 후련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영혼은 눈을 감지 않고 계속해 빛을 발하는 채로 떠 있었다. 해가 뜨고 저무는 지평선 너머로, 대지와 바다를 아우르는 빛의 스펙트럼과 영원의 경계 너머로.  








눈을 떴을 때, 모든 건 그대로였다.


모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온몸이 그대로 굳었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모든 것이 지난 과거로 남은 기억 속 장면보다도, 더욱 구체적이고 생생한 모습으로 구현되어 있었다. 아니, 구현되었다는 표현은 잘못이었다. 정말로, 자신이 과거로 돌아와 ‘있는’ 것이었다.


믿기지 않았지만,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건전지가 나갔는지 멈춰 있는 시계는 침대맡 탁상에 장식품처럼 놓여있었고, 매번 처음 몇 장을 읽다 마는 책들이 몇 권 쌓여 있었다. 창문을 반쯤 가린 커튼은 그 무렵 한국에 막 들어왔던 이케아 1호점에서 처음 쇼핑을 하며 샀던 것들 중 하나였다. 거실의 일인용 소파와 카펫, 짙은 녹색의 전등, 부엌의 작은 식탁과 장에 놓인 찻잔들과 함께.


모현은 경이로움에 닭살이 돋는 걸 느끼며 온 집안을 둘러보았다. 자그마치 5년이란 시간을 살았던 집이었다. 제가 처음으로 마련했던 첫 집.


어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집에서 머물던 모현은 더는 견딜 수 없다는 생각에 발품을 팔아 얼마 없는 짐을 꾸려 원룸텔로 나갔었다. 도저히 아버지와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꾸만 저를 구속하려 들고, 제 일상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잔소리를 넘어선 훈계를 일삼는 그를 더는 참아줄 수가 없었다. 말 한마디 없이, 하루아침에 집을 나간 모현에게 그는 핸드폰이 뜨거워지도록 전화를 걸어댔지만, 모현은 받지 않았다. 다음날엔 번호를 바꾸어버렸다.


화장실도 부엌도 냉장고도 공용이었던 원룸텔에선 2년이란 시간을 버티며 지냈다. 누가 제 반찬을 훔쳐먹을까 노심초사하며 냉장고 깊숙이 반찬통을 숨기고, 아무리 제 방 호수를 네임펜으로 적어놓아도 걸핏하면 없어지는 음료수나 간식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관리인을 찾아가도, 고작 그런 것 때문에 CCTV를 볼 수는 없다는 관리인의 무책임한 태도에 부엌을 이용하기를 포기하기도 했었다. 방은 한 평도 안 되는 크기에 겨우 얼굴만 한 작은 창문이 나 있었다. 고장 난 화재경보기는 걸핏하면 울려댔다. 먼지 쌓인 에어컨은 무용지물, 난방은 중앙난방이라 제대로 방이 데워지질 않았다.


그 인고의 시간을 버텨서 보증금을 마련한 모현은 바로 그 집을 구했었다. 얼마나 열심히 발품을 팔면서, 곳곳의 부동산을 쏘다니고 중개인을 귀찮게 했던지, 나이보다 넉살이 더 늘어 사람을 대하는 데 필수적인 뻔뻔함을 갖출 수 있게 되었더랬다.


그렇게 애정이 깃들어있던 집을, 원치 않게 잃어버렸다가 겨우 다시 되찾은 기분이 들었다. 모현은 그만 차오르는 눈물을 그대로 흘려내며 자주 앉아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던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익숙한 냄새와 익숙한 촉감이 온몸을 이완시켰다. 너무너무 그리웠어. 이 모든 게. 모현은 고개를 기울였다. 책상 위에 놓인, 엄마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진관에 가서 함께 찍은 사진이 담긴 액자가 보였다. 그 사진 속의 엄마는 할머니에게 시집 선물로 받았다는 낡은 시계를 맨 오른손으로 편지 쓰기를 즐기던 왼손을 감싸고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엄마의 어깨를 감싸 안고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다정다감하지도, 쉽게 스킨십을 하는 사이도 아니었으면서. 그래서 엄마를 마지막으로 본 그날 아침에도 짜증 섞인 투정으로 등을 돌렸으면서. 창밖에서 비춰온 햇빛이 액자 모서리에 걸렸다. 저것마저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모현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그대로 긴 잠에 들었다. 돌아온 그곳의 계절은 여름이었다. 열린 창문으로 더운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모든 게 꿈만 같았지만 돌아온 과거의 현실은 집의 모습보다 더욱 생생한 양상이었다. 그즈음 모현은 겨우 살 집을 구하고 조금 더 큰 규모의 회사로 이직을 한, 아직도 사회초년생에 불과한 자신을 가엾고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때의 감정과 기분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모현은 물기 어린 추억과 동화된 현실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인생에서 두 번째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돌아왔다는 건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로 돌아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왜 하필 이때로 돌아온 거지? 모현은 의아했지만,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제 눈앞에 홀연히 나타나선 과거로 돌아가겠느냐고 물은 사람이, 정작 과거로 돌아오자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혹시 그 모든 게 전부 꿈이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했다. 지난 날들이, 너무도 지긋지긋하고 답답하기만 했던 날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아직도 그 시간과 그 집에 매여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이 좁디좁은 1.5룸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넓은 아파트에 살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단단한 결속에 묶여있는 양 갑갑했던 마음이, 그 축축하게 젖어있던 슬픔이 아직도 느껴지는데.


그럼에도 모현은 이 기적 같은 순간을,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오롯이 만끽하기로 마음먹었다.


모현은 유산의 경험도, 첫 관계의 경험도 없이, 활기 넘치는 자신의 몸으로 돌아온 것도 기뻤다. 막 이직한 회사에선 사수에게 일을 배우고 넘겨받느라 이틀마다 야근을 하는 등 바쁘고 나날이 힘겨웠지만, 그마저도 감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분주했던 날들이 그리웠었다. 정작 회사를 다닐 때는 일을 그만두고 푹 쉬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모현 씨, 5층 가는 김에 이 결재서류도 같이 좀 부탁드릴게요.”


아, 잊고 있었다.


당신을.


아니, 잊고 싶어도 잊지 못했다.


모현은 제게 그 미끈한 낯과 단짝처럼 느껴지는 길쭉하고 부드러운 손으로 서류를 내미는 남자, 한때 한 집에서 살을 섞고 살았던, 자신의 남편을 마주하곤 멍해졌다.


저 남자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거겠지.


나만이 당신을 기억하고, 당신을 애증으로 여기겠지.


“모현 씨?”


그남이 물었다. 모현은 정신을 차리며 그와 눈을 맞췄다.


“예, 그러죠.”


모현은 그 서류를 뺏어들 듯이 가져가고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건 흔히들 표현하는 방식대로의 설렘도, 경이도 아니었다. 세밀하게 표현하자면 긴장 혹은 두려움에 가까웠다.


혹시 데자뷰 같은 걸 느끼는 건 아니겠지. 날 알아보는 건 아니겠지. 꿈에라도 날 떠올리고, 나와의 기억을 떠올리고, 날 붙들고선 화를 내고 따져 묻는 건 아니겠지.


어떻게 자길 버리고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느냐고.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모현은 혼자 탄 엘리베이터에서 소스라치게 몸을 떨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냐, 그런 일은 없어. 있을 수 없어.


하지만… 있을 수 없다고 여겼던 일이 이미 제게 현실로 일어난 이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러한 의심에는, 선뜻 의심을 떨쳐내기에는, 어쩐지 자신이 없었다.


남편은 모현과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사람이었다. 공채가 없어진 시대에 동기라는 말도 무색해졌지만,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사람들끼리는 서로 동기라고 부르자며 친목을 다지는 분위기였기에 서로 마주치면 스몰톡도 나누고 어쩌다 가끔씩 술자리도 갖는 정도의 사이였다. 다른 팀이었지만 같은 층의 사무실을 썼기에 자주 마주쳤다. 물론 그남은 업무상 외근이 잦아 매일 볼 수는 없었지만. 예전의 저였다면 그런 그남에게 호감을 가진 후, 그남을 매일 보지 못하는 걸 아쉬워하고, 그 아쉬움과 동반된 설렘으로 그남에 대한 감정을 조금씩 일깨워갔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모현은 일부러 그남을 피했다. 그남이 인사를 해도 서름하게 고갯짓만 하고 지나쳤다. 혹시나 제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까 두려웠다.


실수.


그렇다. 그남을 만난 것은 실수였다. 모현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이 회사에 들어온 이상 그남을 만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그남에게 마음이 가도록 한 것은 실수였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모현은 그렇다고 너무 티가 나지는 않도록 다른 동기들이나 사원들과도 적당히 거리를 두었다.


그래, 이게 바로 그 ‘적당히’였구나.


모현은 자조했다.


크게 애쓰지 않더라도, 남에게 관심이 기울거나 하는 일은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므로, 그런 종류의 실수를 할 경우는 발생하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모현은 퇴근길 버스에서, 굳어진 얼굴을 쩍 벌리고 안면근육을 푸는 스트레칭을 하고서도 이따금 창가 너머의 전경을 스치면서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금세 가을이 되고, 공기가 싸늘해졌다. 사람들은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거나 땅만 보면서 걸어갔다. 누구 하나 눈을 맞추는 사람이 없었다. 모현은 저 사람들 속에서 혹시나 누군가가 있을까, 저와 같은 사람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전에도 이와 같은 생각을 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랐다. 물론 분명히 다른 결이었지만.  








부장의 지시로 예정에 없던 회식이 잡힌 날이었다. 하필이면 회사 바로 근처의 번화가, 인파가 어디나 몰리는 금요일 밤이었다. 모현은 어떤 핑계라도 대서 빠지고 싶었지만, 어째선지 스멀스멀 흘러나간 제 가정사의 단편을 알고 있는 부장에게는 아무것도 먹혀들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미리 체념한 뒤였다.


“저희 테이블 여기 맞죠? 어유, 자리가 널찍하네. 영업팀은 좀 늦을 건가 봐요.”

“안 그래도 제가 방금 염 대리한테 연락을 받았는데, 막 오고 있는 중이랍니다.”

“어유, 길이 막히나 보네. 그래도 오긴 오겠죠.”

“그럼 미리 시켜놓는 게 좋겠는데.”

“그러죠. 여기, 주문 좀 하겠습니다.”


맨 끝자리에 앉은 모현은 하나둘씩 메뉴를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백색소음처럼 들으며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뭘 시키겠냐는 대리의 물음에 얼른 메뉴판을 보고선 대다수가 고른 A정식을 먹겠다고 했다.


“영업팀 분들은 뭘로 주문하죠?”

“그냥 A정식으로 통일하죠. 사장님도 그게 제일 잘 나가는 거라고 하시니까.”


그때 모현은 어느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저도 모르게 뇌리에 떠오른 기억은, 바로 그남과 함께 식사를 차리던 몇 안 되는 가정적인 풍경의 장면이었다. ‘맞다, 당신. 아직도 편식해? 저번에 보니까 콩만 쏙 빼놓더라.’ 그남은 웃으며 말했다. ‘싫어하는 게 아니고 못 먹는 거야. 알러지가 있어서. 원래는 되게 좋아했는데.’


모현은 손을 들고 말했다.


“저, B정식으로 바꿔도 되겠습니까?”

“그러든지.”


옆에 앉은 직원이 주문서를 들고 선 알바생에게 말했다. “A정식 하나는 B정식으로 바꿔주세요.”


십 분 후, 차례로 정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 감각이 무뎌지도록 지루함을 느끼던 즈음에서야 영업팀 직원들이 하나둘씩 도착했다.


“아유, 늦어서 죄송합니다. 차가 어찌나 막히던지. 대로변이 시장통이 따로 없었어요.”

“아, 금요일 밤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뭐. 어서들 앉아요. 시장하죠. 미리 시켜놔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배가 등가죽에 붙었겠네.”


하하 웃으며 부장이 손을 뻗었고, 영업팀 직원들은 빈 테이블에 한 자리씩 앉았다.


모현은 곤란할 때 짓는 버릇으로 입안의 살을 깨물었다. 하필 맨 끝자리에 앉아있던 모현의 건너편에, 그남이 앉은 것이었다.


“엇….”


그남이 정식에 놓인 반찬과 국을 보고는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두부김치와 된장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랑 바꾸실래요?”


모현이 묻자, 그남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사실 제가 직전에 주문을 바꿨는데, 그냥 원래대로 A정식을 먹고 싶어서요.”


그남은 멋쩍은 얼굴로 “그러죠”하고는 일어나서 정식이 든 트레이를 바꿔 놓았다.


모현은 제 얼굴에 간간이 눈길을 주는 그남을 모른 척하며 천천히 밥을 먹었다. 그남이 말을 걸어와도 모현은 저어하는 기색을 띠며 적당히 대꾸하고 대화를 길게 이어나가지 않았다. 그남은 모현이 피곤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을 했는지 더는 말을 걸지 않고 옆자리에 앉은 같은 팀 직원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어서 다른 테이블에서 부장이 건배사를 하자며 잔을 들자, 차례로 잔을 들고는 부장을 따라 진부한 쌍팔년도 건배사를 외치고 잔을 비웠다. 집에 가고 싶다. 모현은 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지친 표정으로 잔을 내려놓았다.


“더 안 드세요?”


그남이 소주병을 들고 있었다. 그랬지. 당신은 주량이 센 편이라 한 번도 필름 끊기는 걸 본 적이 없었어.


모현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내렸다.


“괜찮습니다.”


자리가 파하고 노래빠에 가자는 부장의 말에 일부 무리는 끌려가고, 모현은 제대로 취해서 몸을 못 가누는 사람들을 집에 보내느라 2차에 빠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택시를 잡았다.


다 보내고 남은 것은, 또 하필 두 사람이었다.


“모현 씨, 말씀을 못 드렸는데…. 아까는 감사했어요.”


그남이 쑥스런 낯으로 발코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가요?”


모현은 애써 무심한 체하며 딴 곳을 보았다. 대로의 끝, 빠르게 지나가는 차량들의 불빛과 소음에 초점을 둔 채로 서 있었다. 어서 자리를 뜨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런 비언어적 의사소통으로 충분히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남은 제 감정을 전달하기에 여념이 없는지 말을 이어갔다.


“사실은 제가 콩 알러지가 있어서, 그게 들어간 음식을 못 먹거든요. 근데 어디 가서 이런 얘길 못했어요. 우리나라가 좀 그렇잖아요. 뭘 가리거나 하면 유난스럽다고 하고. 가뜩이나 제가 하는 일이 여기저기 다니는 건데 어딜 가서 같이 밥이라도 먹으면 피하기도 어렵고… 아무튼. 그래서, 아까는 정말로 감사했어요.”


모현은 그렇게 말하는 그남이 정말로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쌍도 출신 집안의 장남 치고 그런 부드러운 언사를 표하는 그의 모습과 그런 진심이 다정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모현은 제게서 눈길을 떼지 않는 그를 외면하듯 계속해 대로의 끝을 향해 선 채로 말했다.


“전 몰랐어요. 그냥 제가 바꾸고 싶어서 말씀드려본 건데. 그랬다면 잘됐네요.”


모현은 그렇게 말하고선, 손을 들었다. 자정이 넘어가니 택시가 잘 잡히질 않았다. 좀 더 큰 길목으로 나가봐야 할까. 모현은 그남에게 그만 인사하고 다른 길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대리 불렀는데… 혹시 괜찮으시면 제가 집으로 데려다드릴까요?”


모현은 잠시 혹할 뻔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이만하면 적당히 선을 그은 것일 테다. 그남도 제가 거절 의사를 명백하게 드러냈음을 알아들었을 테다. 모현은 그남을 등지고 술집이 즐비한 그 거리를 떠났다. 허연 입김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모현은 택시를 타고 집에 가면서 생각했다. 그게 우리가 처음으로 가까워졌던 순간이었지.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보았고 서로의 눈에서 자신의 낯선 모습을 발견했었지.


일어나지 않길 바랐지만,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마는 걸까.


모현은 한숨을 쉬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제게 의문만 남기고 사라진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지. 일어날 일을 피할 수 없는 거라면, 그대로 겪어나갈 수밖에 없는 거라면, 왜 과거로 돌아오기로 했는지. 자책이 들기도 했다. 허나 이미 떠나온 미래는 너무나 멀리에 있었다. 육 년의 시간. 지난 후에는 짧게만 느껴지지만, 앞두고 있을 때에는 너무도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시간.


돌아온 월요일, 모현은 제 책상에 놓인 비타오백 한 병과 쪽지 한 장을 보았다.


‘혹시 시간 되시면 같이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이미 눈에 너무도 익숙한 글씨체였다.


모현은 그 쪽지를 손에 구기고선 쓰레기통에 넣었다. 비타오백은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마시라며 주었다.


하지만 점심시간 자신을 찾은 그남의 얼굴을 보고는, 제가 다시 실수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감했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그남은 혼자 밥을 먹으려고 조금 늦게 자릴 나섰던 모현을 따라오며 말했다.


“다 봤어요. 모현 씨가 제가 남긴 쪽지 버리는 거.”

“…….”

“모현 씨는 제가 그렇게 싫으신가요? 그래서 그렇게 제 마음을 짓밟으신 건가요?”


모현은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답했다.


“그런 비약이 어디 있습니까?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세요. 그럼 제가 그 쪽지를 제 일기장이나 어디 뭐 잘 보이는 데라도 붙여놓고 간직했어야 된다는 말씀이세요?”

“그건 아니지만….”


눈에 띄게 서운해하는 얼굴에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이 또한 내가 피할 수 없는 일인 걸까. 어쩔 수 없는 걸까.


이건 인정을 가진 사람이라서일까. 아니면 한때 당신을 너무나 사랑한다고 믿었던 여자라서일까.


모현은 혼란과 회한을 동시에 느끼며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멈춰 있었다.


그런 모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그남은, 돌연 모현의 손목을 잡고선 어딘가로 향했다.


“어딜 가는 거예요?”

“점심 같이 먹어요. 잘 아는 맛집이 있거든요.”


모현은 그남의 팔을 뿌리쳤지만, 순순히 그남을 따라갔다. 이렇게까지 다가오는데 더는 거절하기도 힘들고 어렵게 느껴졌다.


같이 칼국수를 먹다 말고 그남이 말했다.


“모현 씨는… 참 묘한 사람 같아요.”


우물우물거리던 모현은 전처럼 예의를 차리거나 할 생각도 없이 입에 음식물을 머금은 채로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남은 그런 모습이 매력적이라는 생각이라도 하는지 살풋 웃었다.


“어떨 때는 사람을 참 편안하게 해주다가도, 또 어떨 때는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들잖아요.”

“…….”

“그러다가도 가끔은… 당신이 신기해요. 꼭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당신이 편하게 느껴지고, 당신을 알고 있는 기분이 들어요.”


모현은 사레가 들러 켁켁 거리다 물을 마셨다.


“요즘 누가 그런 식으로 작업을 거나요? 정말 들어줄 수가 없네요.”


모현은 반쯤 남기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남은 아무리 모현이 밀어내도 좋다는 양 헤벌쭉 웃는 얼굴로 그를 졸졸 따라왔다.


“커피 안 마셔요?”

“밥 먹고 바로 커피 마시면 안 좋아요.”

“그래요? 이상하네. 항상 보면 꼭 아이스 라떼 들고 있던데.”


모현은 그를 찌릿, 노려보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자꾸만 드팀새를 좁히고 다가오는 사람을 막기도 역부족이었다. 모현은 아무리 제 마음을 단단히 굳히고 틈을 내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어떻게든 사소한 틈을 만들어 비집고 들어오는 그남의 끈질김에 자주 놀라고는 했다. 처음 만났던 당시보다도 지금의 그남이 더욱 열정적이고 활기 찬 느낌이었다. 사람이 이렇게도 다를 수가 있을까. 분명 같은 사람인데. 아니, 많이 다르지는 않은데. 모현은 그러다 설마, 싶었다. 제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저 사람의 반응과 관계의 진전도 달라지는 것일까.


모현은 갈수록 늘어가는 그남의 메시지와 통화 횟수, 그리고 작고 사소하지만 신경이 안 쓰일 수 없는 그남의 선물들에 한숨이 늘어갔다. 혼란스러우면서도 이 익숙한 설렘에 마음이 약해지는 걸 느꼈다.

그남이 말했듯이, 자신은 이미 그남에게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예전과 같으면서도 또한 다른 지금의 일련의 공세들에 속속들이 무너져가고 물들어가는 기분이 드는 것도, 너무도 익숙하고 심지어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봐. 절대로 돌아가선 안 돼. 그 지긋지긋한 날들로. 벗어나고만 싶었지만, 뜻대로 벗어날 수 없었던 곳으로. 모현은 자꾸만 일렁이는 제 마음을 어떻게든 움직이지 못하도록 가두고 싶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야. 하지만 제 마음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았고, 그런 엄청난 혼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이미 그남이 제 삶에 들어와 있다는 반증이었다. 잘도 떼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영영 떨쳐버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모현은 울고 싶었다. 아무리 과거를 돌려도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자신의 미래와 운명이 지독하고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예전과 똑같이, 제 영혼의 빈틈과 속을 파고드는 고독의 냄새도, 갈수록 더욱 견딜 수 없게 느껴졌다.


그러다 그런 선택을 하게 되어버렸었지. 그래, 나도 알아. 홧김에 해버린 결정이었다는 걸. 그게 나를 셀 수 없는 결정들로 부수어지게 만드리라는 걸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결과를, 벌어질 일들을 알면서도, 나는 왜…… 이다지도 자신이 없을까.


안 돼. 생각해. 너는 생각을 해야 해. 그 사람과 결혼한 뒤로 모든 게 바뀌었던 날들. 처음 얼마간은 잃었던 가족을 되찾은 것 같은 느낌에 안온함을 느꼈지만, 모습만 다를 뿐 본질은 같은 고독을 다시금 껴안고 살아야만 했던 날들. 모든 걸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빼앗긴 것만 같았던 날들.


잊어서는 안 돼. 절대로.


“모현 씨, 우리… 결혼할래요?”


절대로.

무너져서는 안 돼.


모현은 그남에게서 반지를 받은 날,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프로포즈를 받았던 다른 과거를 떠올렸다. 똑같은 반지, 똑같은 헤어스타일, 똑같은 포즈와 똑같은 말투. 그 자신감 넘치는 당당한 태도에 감탄하며, 사실은 그것이 자기애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단 것을 모르는 채, 그 장면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니라 그남임을 모르는 채, 스스로를 주인공이라 믿으며 값싼 행복에 겨웠던 순간을.


모현은 이미 알고 있던 일이 기어코 닥쳐왔다는 생각에 도리어 덤덤했다. 무미건조한 낯으로 반지 케이스를 돌려주며 말했다.


“조금만 더 생각하고 말해줄게요.”


그남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뭘 더 생각한다는 거예요?”


모현은 자신을 위한 설명을 요구하는 그남을 뒤로하고 곧바로 집으로 왔다. 하지만 집까지 따라온 그남은 혹시 제게 속상했던 것이 있거나 제가 잘못했다고 느낀 게 있다면 이 자리에서 풀자며 대화를 요구해왔다. 정말 끈질기기도 하지. 저 끈질김이 저를 향한 열정이자 애정이라고 믿었던 자신이 구차하게 느껴졌다. 모현은 그만 가보라며 그남을 밀어내고는 현관문을 닫았다.


신발을 벗고 거실을 걷다가 카펫 위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지쳐 있는 자신, 이도 저도 아닌 자신을 느끼면서 자책감과 외로움이 밀려왔다.


눈앞이 캄캄했다. 더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대체 왜 돌아온 걸까?


왜 그렇게 나는 그때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 했을까?


그 사람은…… 왜 나를 과거로 돌아가게 했을까?


모현은 몸을 웅크린 채 눈물을 흘렸다.


그 순간.

마치 동화처럼, 힘든 순간에 우는 일밖에는 할 줄 모르는 가련한 주인공을 돕기 위해 나타난 요정처럼, 그가 나타나 있었다.


“모현 씨.”


모현은 저도 모르게 일어나 그를 껴안았다. 그에게, 당신이 그리웠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째선지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가 제 어머니를 닮은 것도, 오랜 친구를 닮은 것도 아닌데. 그는 그저 웬 신비한 마법을 부릴 줄 아는 낯선 이일 뿐인데. 이상했다. 하지만 모현은 그리움과 외로움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목까지 차오른 그 말을 차마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랬다.


겨우 눈물을 그치고서야 모현은 똑바로 물었다.


“왜 저를 여기로 돌아오게 한 거죠? 대체 어떻게요? 아니, 대체 왜요?”


이제야 그런 걸 묻느냐는 듯 그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 의미를, 그의 내포된 감정을 헤아릴 수 없는 미소였다.


“모현 씨. 당신 지금…… 무척 외로워하고 있군요.”


그는 제 눈빛만 봐도 감정을 다 파악한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자 모현은 두려움과 동시에 반발심이 들었다. 당신이 왜 날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거야!


“그래서요? 그래요. 저 미치도록 외로워요. 그래서 홧김에 저 구려터진 프로포즈라도 확 받아버릴까 싶을 정도예요.”


모현은 실성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다 이렇게 미쳐 돌아가는 건가 봐요. 그래서 다들 그 모양 그 꼴로 살아가게 되는 건가 봐. 하, 하하….”

“모현 씨.”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라며 모현의 어깨를 느릿하게 어루만졌다. 놀랍게도 그 손길엔 어쩐지 애틋한 느낌이 담겨 있었다. 모현은 전과 다르게 따스함이 담겨 있는 그의 눈빛에 더욱 놀랐다. 아니… 그때도 저런 눈을 하고 있었던가?


“모현 씨, 괜찮아요. 나는 당신을 이해해요.”

“…….”

“외로움은 사람에게 필수적인 감정이에요. 감정이자 동력이기도 하죠. 또한 외로움은 당신의 그림자와 같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고요. 하지만 그림자는 항상 보이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죠? 당신이 그것을 의식하거나, 밝은 빛을 마주했을 때나 보이는 거죠.”

“…….”

“그러니, 한낱 그림자에 휘둘려 당신의 기회를 함부로 내던지고 잃어버리지 말아요.”


그런 말을 해준 이는 처음이었다. 진심이 담긴 조언. 그 사람은 마치 자신의 삶뿐 아니라 모두의 삶과 그 각자의 삶이 돌아가는 역학을 다 꿰뚫고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인자하고 총명한 눈빛을 발하며 제게 진심을 전하고 있었다.


모현은 다시금 울컥하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당신은……대체 누구죠? 왜 나를 도와주려는 거예요?”


그는 그제야 환히 웃었다.


“어떻게 이 모든 일이 가능하냐는 것보다 그걸 더 궁금해하는군요.”


모현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누구든 그러지 않겠어요? 당장 이해할 수 없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걸 더 궁금해하잖아요.”

“그래요. 다들 그렇죠.”


그는 모현의 등을 토닥이며 소파에 앉혔다. 모현은 그의 너그러움에 이끌리어 잠들고 싶은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모현을 일깨워주려는 듯이, 분명한 투로 말했다.


“내 이름은 ‘모래’예요.”


그는 품에서 시계를 꺼내 보였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골동품처럼 보였다. 가죽 줄은 낡아서 헤져 있었고, 금테는 여전히 반질반질 빛이 났지만 유구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 있는 듯 보였다.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봐요. 누가 지어준 건가요?”


모현은 그를 다정한 친구처럼 편하게 느끼며 물었다.


“당신이요.”


그러나 뜻밖의 말에 모현은 당황스러웠다.


“제가요? 제가 왜 당신 이름을….”


그러다 마주친 그의 눈동자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 모현은, 저도 모르게 온몸을 떨었다. 그 속에 깃들어있는 자신의 모습이 지금 제 눈앞에 있는 그 사람과 너무도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은…… 지금보다 좀 더 많은 시간을 지나서, 더 많은 것들을 알고 더 많은 것들을 느끼고, 세월을 통해 얻은 지남력과 통찰력으로 삶을 갈무리할 준비를 하는, 훗날의 자신이었다.


“나는 당신의 딸이에요.”


그 담담한 말에 담긴,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것들이 제 가슴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그가 지나온 시간, 그가 행해온 노력과 숱한 고민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사랑.


“나는 당신에게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과거로 왔어요.”


믿을 수 없는 말뿐이었지만, 모현은 그를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묘한 기시감과 안정감, 그리고 뭉클한 애정이 느껴지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조금만 더 지체했다간 이 시공간에 붙잡힐 수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해요.”

“잠시만! 잠시만요.”


모현은 그를 붙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기력이 쇠한 듯 온몸이 흔들렸지만 그가 붙잡아주었다. 모현은 일렁이는 마음을 그대로 꺼내보인 듯이 허망해진 기분과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내가 이대로 결혼하지 않으면…… 당신은…… 당신은, 태어나지 못하는 거잖아요!”


모현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먼저 눈물 한 줄기를 빛바래고 메마른 얼굴로 흘려보내고 있는 그 사람, 자신의 딸, 모래를 바라보면서는 차마 울 수가 없었다.


“당신은 당신 자신만 생각하세요. 나는 나의 인생을 충분히 살았어요.”


모래는 모현을 마지막으로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나는 이미 나의 길을 걸어왔어요.”


그리고 모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깊은 잠에서 깨었다.


실로 꿈인가 싶었지만, 코끝에 닿아오는 인센스 스틱의 향기에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꿈이 이렇게나 선명한 감각을 줄 리가 없었다.


현실은 그토록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직조물이었다.


그 얼기설기 엮인 낱줄과 씨줄 사이를 지나 제게로 닿아왔던 이는, 영영 그 완벽하고 완전한 비밀을 알려주지 않을 테지만, 그러한 현실의 이치만은 제게 알려준 셈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 방에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와보니, 여전히 내가 살던 나의 집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의 방. 나의 집.

나만의 공간. 나만의 시간.

나만의 삶.


내 손에 쥐고 있던 것들, 내가 어여삐 여기던 것들이 모두 이곳에, 이 시간에 있었다.


나는 침대가 놓인 방으로 돌아가 인센스 스틱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받은 선물 중 가장 값진 것이었다. 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 흔적들을 모두 치우고 버렸지만 아직도 그 향기가 감돌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커튼을 치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바깥은 봄이었다. 돌고 돌아 다시 마주한 따스한 봄. 볕살이 온몸을 가득 비췄다. 시원한 공기가 폐부까지 스며들었다. 이내 제 살결을 스치고 방안을 가득 채웠다. 사소한 일인데도 기분 좋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테지만, 영원히 제 안에 살아있을 이에게 닿도록.


빛바래지 않도록 매일 닦아주는 목테 액자 옆엔 다른 액자가 놓여있었다.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그린 누군가의 따스한 얼굴이 담겨 있는.


어느 화창한 봄날의 꿈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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