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갔는데!
생각하기도 싫은 아빠의 교통사고. 그렇게 아빠는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항상 말없이 우리를 지켜보시던 그 아빠가 사라질까 봐 생각조차 하기 싫었던 현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빠를 보내드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보다 늘 함께 했던 엄마는 어땠을까?
엄마가 몸이 안 좋아 병원에 입원했었다. 엄마는 담석이 있어서 자주 치료를 했었다. 그때도 담석을 레이저로 깨고 치료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엄마가 열이 났다. 그래서 병원을 가서 담석을 제거했는데 열이 나니 쓸개를 잘라내는 수술을 또 했다. 병원에 들어갈 때는 걸을 수 있었는데 병원에 있는 동안 엄마는 걷지를 못했다.
그러는 동안 병원에서는 퇴원을 하라고 했다. 엄마는 걷지 못하는데 퇴원이라니 그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우리는 퇴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퇴원 수속을 하는 중에 엄마가 외래로 신경과에 예약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퇴원하기 전 뇌 신경과에 가게 되었다. 우리는 어머니가 담석으로 병원에 왔는데 거동을 못 하게 됐다는 얘기를 했다. 그렇게 엄마는 그곳에서 뇌경색이라는 판명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뇌 촬영을 하기 전에 먼저 설문 조사를 하게 되었다. 그때 엄마는 상당한 우울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퇴원하는 날에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은 아빠와 비슷한 인상을 가졌네! 너희 아빠와 하루만 더 산다면" 하는 말씀을 하셨다. 아빠가 돌아가실 때 우리 생각만 했다. 엄마의 마음을 보이지 않았고, 엄마는 아빠의 장례식을 치르랴 슬퍼할 수 없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혼자 식탁에 앉아 밥을 먹을 때 엄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식탁에 온도는 어땠을까? 나는 엄마가 용감한 사람이라 혼자라도 씩씩하게 밥을 먹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빠의 빈자리는 아무리 용감한 엄마라도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엄마라는 자리는 아들, 딸들이 대신해 주지만 남편이라는 자리는 아빠가 대신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느낀다.
엄마는 용감해서 많은 자식을 떠나보내고 사셨지만 그래도 아빠가 있어서 힘들면서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빠가 없는 엄마의 옆자리는 늘 공허함만 맴돌았을 것이다. 엄마의 우울증 진단을 받고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매주 한 번씩 엄마가 있는 병원에 찾아가는 것뿐이었다.
울 엄마는 오빠를 어느 딸들보다 사랑하면서 금상 아들로 키웠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엄마를 외롭게 병원에 있게 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오빠가 그럴 수 있을까? 누구보다도 그렇게 사랑해 주었는데! 오빠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람은 믿는 것이 아니라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고! 누가 말하는 것 같다.
엄마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을 주셨다.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사랑이었기에 엄마가 그토록 사랑했던 오빠를 이해하고 있다.
나도 그럴까? 나도 똑같을까? 울 시 어머니는 친정어머니보다 더 세니 병원에 가시지 않을 것이다. 시댁 식구들은 누구보다 어머니를 사랑하고 울 남편도 귀남이니 잘할 거다.
혼자 밥을 드시고 우울해도 아들을 자신보다 사랑하시던 엄마는 그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엄마 잘 지내고 계시죠! 아빠랑 같이 말 안 드는 막내딸 잘 보고 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