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속에 억새처럼
가을이 오면 제주에 사는 나는 산에 억새가 생각난다. 어제 집 다큐를 보니 정원에 억새를 심어 놨다. 아니, 저 잡풀을 꽃처럼 심어 놓다니 대단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강아지풀, 억새 그리고 야생초들이 만든 꽃들을 더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자연스러운 자연과 늘 함께 하고 싶어서 그런가 보다.
어제 남편과 제주 억새를 마음껏 보기 위해 산굼부리를 찾았다. 도시 근교에 새별오름도 억새가 많지만 그곳은 지금 도새기 축제로 사람이 붐벼서 산굼부리로 가기로 결정했다. 어제 비가 와서 아들이 차를 가져갔다. 그래서 우리는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다행히 버스는 터미널에서 산굼부리 바로 앞까지 가는 버스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자주 다니는 교래리를 지나자마자 있었다. 평소에는 차 없으면 가지 못할 줄 알았다.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던 산굼부리를 버스로 갔다 오고 나니 생각처럼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사이좋게 주말 바람을 쐬었다.
나는 산굼부리에 억새보다 분화구를 만든 언덕에 올라가니 지평선 너머 한라산과 기생오름이 더 아름다웠다. 한라산은 구름에 가려 보일 듯 안 보일 듯 옆에 작은 기생 오름만 보였다. 한라산은 구름 속에 갇혀 잘 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구름 속에 가려진 한라산을 볼 수 있다. 보일 듯 말 듯 구름 속에 가려진 한라산처럼 남편과 나는 끝도 없이 전쟁과 평화를 하면서 30년을 살았다. 그 이유는 한라산과 같은 신기루가 나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친정 부모님을 보면서 나도 부모님처럼 잘 살고 싶었다. 그러나 나와 남편은 같으면서도 달랐다. 하지만 투닥투닥 싸우면서도 늘 한결같이 살았다. 구름에 가려진 한라산처럼 신기루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화창한 날씨에도 바람이 불고 높은 산은 구름이 있었다.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늘 구름이 오락가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라산 같은 신기루가 있다고 생각했다.
바람에 이리저리 움직이는 억새를 바라보면서 이 억새가 내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바람 속에서 견디고 척박한 땅에서 피는 억새처럼! 억새는 한라산을 품고 있듯이 나도 멋진 산을 품고 있었다. 화창한 날씨에도 바람이 휘몰아치지만 멀리 한라산 같은 신기루가 있다. 꼿꼿하게 피어나는 억새처럼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