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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이라고 불립니다 Feb 27. 2021

할머니의 손칼국수

나의 힐링푸드

칼국수 먹는 날

오늘 날씨 영하 11도,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다.

창문을 열고 환기하다가 보니 몸이 부들. 떨린다.

'아, 뜨끈한 거 먹어야겠다.'

자연스레 드는 생각이다.

생각이 들면, 스스로 해 먹을 수밖에 없는...

사 먹을 수도 사 먹을 곳도 없는 이국 생활.

먹고 싶은 거 한 그릇을 먹겠다고,

굳이 번거로운 일을 시작한다.

멸치와 다시마를 꺼내 냄비 물에 담그고 불을 켠다.

냉동고용 비닐봉지에 밀가루와 물을 넣어 조물조물 반죽을 한다. 한 덩어리로 뭉쳐지면 냉장고에 넣어둔다.

보통은 귀찮아서 반죽을 뚝뚝 떼어 수제비로 해 먹지만,

오늘은 칼국수다. 몸도 마음도 추운 날, 힐링푸드가 필요하다.

식탁 위에 유산지를 깔고 밀가루를 뿌려 반죽을 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얇게 밀려고 해도, 여전히 두툼하다.

나는 뭐, 두꺼운 면 좋아하니까.

자기 합리화를 하며 밀기를 멈춘다.

겹겹이 밀가루를 뿌려 접고 칼로 썰어낸다.

밀가루 반죽과 밀대로 밀기는 참 힘든 작업이다.

이런 어려운 일은 할머니는 어떻게 30년이나 하셨을까?

칼국수를 먹을 때, 혹은 길거리나 TV 화면에서 칼국수가 나올 때면 당연하게 떠오르는, 

우리 할머니...

어렸을 때 나는 칼국수집 손녀였다.


원조 손칼국수

종암동 작은 골목의 손칼국수 가게.

할머니가 30년 터를 잡고 일하셨던 곳.

부모님과 함께 오던 자녀들이 그들의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먹는 곳,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하신 아버지가 이 만두가 먹고 싶다고 하셔서 아들이 사러 오는 곳...

세월이 묻은 가게들이 갖고 있는 그런 뻔한 스토리를 갖고 있는 곳이었다.

할머니 가게는 손칼국수, 만두, 수육 이렇게 3가지 메뉴만 있었다. 

만두는 일반 만두가 아니고 고기와 호박이 들어간다. 

여름에는 냉면을 하라는 주위의 성화에도 굴하지 않고 뜨거운 칼국수를 고집하다가, 콩칼국수를 하기도 했지만 더운 여름에도 뜨거운 칼국수가 더 잘 팔렸다.

두어 번 정도 TV에도 맛집으로 소개가 되었는데, 할머니는 뒷모습만 나오셨다. 

부끄럽다고 굳이 뒷모습만 출연하시겠다고 했단다.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지방에서 살았기 때문에, 명절이면 역귀향을 했다. 

가족들은 할머니 집에서 지내고, 나는 할머니랑 가게에서 잠을 잤다. 가게에서 노는 게 재밌었다.

아침이면, 부스럭부스럭 비닐 소리, 왁자지껄 수다 소리, 보글보글 양지 국물 끓이는 냄새에 잠이 깬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밀가루 반죽을 하고 계셨다. 

일하는 아줌마들 뿐 아니라 지나가던 동네 아줌마들까지 거들며 밀가루 반죽을 했다.

장사가 바쁜 시간이 되면, 나는  할머니가 주신 넉넉한 용돈을 들고 맞은편 만화가게로 갔다. 입이 심심하면 또 가게 맞은편의 슈퍼로 가서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사 먹었다. 그러다 만화방 옆의 문방구에 가서 수첩이나 연필 등을 사기도 했다. 저녁 장사 때는, 할머니가 챙겨주신 귤이나 떡, 유과 같은 걸 들고 가게 방에 연결된 다락으로 올라가 사온 수첩에 그림도 그리고 빌려온 만화책을 보며 뒹굴거렸다. 

다락문 바로 앞에 손님상이 놓여 있어서, 한번 올라가면 손님들이 다 가실 때까지 나오질 못 했다. 

화장실도 못 가니 할머니는 다락에 늘 작은 요강을 올려둬 주셨다. 답답하지 않으냐고 홀에 앉아있으라고 했지만, 그 또래 여자아이들이 그렇듯, 작은 공간에 내 세계를 펼칠 수 있는 다락이 나는 참 좋았다.

밀가루 반죽이 넘쳐났기에, 반죽으로 찰흙놀이는 기본이었다. 혼자서 놀다가 다락에서 잠이 들면 저녁 장사가 끝난 할머니가 올라오셔서 내 얼굴을 쓰다듬으면 잠이 깨었다. 그리고 칼국수를 먹었다. 

그렇게 칼국수는 내 유년시절의 추억이 있는, 힐링푸드다. 


1997년, 그 당시 나는 명동으로 출근을 했다.

어느 날, 유명한 맛집이라며 동료들이 이끄는 근처 칼국수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잠깐이지만, 줄을 서서 대기를 하다가 들어간 식당은 제법 넓은 홀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나는 서울에서, 돈 주고 칼국수를 사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그날은 처음으로 칼국수를 사 먹어 본 날이었다.

그 날  할머니 가게가 아닌 곳에서 먹어 본 칼국수는, 한마디로 낯설었다.

국물 맛이 진하긴 했으나 원재료의 진한 맛이 아닌 듯 느껴졌고, 하루 종일 끓여내는 할머니 칼국수의 양지 국물의 진한 맛과는 뭔가 다른 맛이었다. 면도 두꺼운 편이라 면에 국물의 간이 배어들지 않았다. 

양념장이 있었던가? 기억이 가물거리는데, 아무튼 할머니의 양념장은 그릇에 칼국수를 조금 덜어 넣고 비벼 먹으면 정말 맛있다. 거기에 잘 익은 동치미의 시원한 국물을 한 모금 먹으면 금상첨화...

머릿속에서는 자꾸 할머니의 칼국수가 그려졌고, 다들 맛있게 먹는 중에 나는 생각만 많아졌다.

아무래도 너무 오랫동안 할머니의 칼국수에 길들여졌었나 보다. 


할머니가 음식을 잘하시니

할머니가 독일에 오셔서 한인교회 사람들에게 거하게 칼국수와 만두를 해주셨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50인분 정도 준비를 해야 해서 할머니가 일이 많으실까 봐 사람들이 도와준다고 했을 때, 

할머니는 쿨하게 50인분이 뭐가 많다고. 하시면서 혼자서 그걸 다 해내셨다. 

반죽도 반죽이지만, 만두 빚는 것까지... 호박은 소금에 절여 물기를 꼭 짜야하는데, 그게 또 보통일이 아니었다. 전날 고깃국물을 끓여놓고, 새벽부터 일어나셔서 칼국수 반죽을 해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만두를 빚으셨다. 

지금이야 내가 만두를 예쁘게 빚지만, 그 당시에는 해본 적도 없었을 때라 할머니 옆에서 잔심부름이나 했었더랬다.

할머니는 독일에 있는 재료들이 달라서 맛이 안 난다고 하셨지만, 나는 독일에서도 김치 맛이, 국물 맛이 한국이랑 똑같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우리는 우리의 음식에 대해 모두들 재료 탓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모두들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그 많은 게 다 동이 났다. 할머니는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시며 고개를 저으신다. 어쩜 그렇게들 많이 먹는지, 처음 봤다고.

그때 할머니 음식을 맛본 사람들은 할머니 손맛을 닮아서... 내가 음식을 잘할 거라고들 기대를 한다.

모르는 소리다. 원래 집안에 음식을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안 하게 된다. 

할 필요가 없어서다. 내가 안 해도 집에 맛있는 음식이 넘쳐나는데 굳이 할 생각이 안 든다.

사실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 밥 한 번을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후회되는 일인데, 김치를 담을 때 명절 요리를 할 때 할머니 옆에서 어깨너머로라도 배웠더라면 참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 한국에 가면, 할머니의 김치와 만두와 양념장과... 그 모든 걸 정확한 계량(물론 할머니는 계량이 없으시기 때문에 각각 무게와 양을 잰 재료들을 두고, 나중에 남은 양을 계산해서 내가 계량을 할 생각이다)을 해서 영상으로 찍어놓을까 한다. 

지난번 설에 녹두전을 하려고 할머니께 전화를 해서 하는 법을 물어보았다. 

(친정집에서는 설에 녹두전과 만두를 꼭 한다)

"그러니까 녹두를 잘 불려, 이렇게 만져봐서 됐다, 싶을 때까지 불려. 

그리고 믹서에 가는데, 물을 너무 많이 넣으면 안 돼. 

조금만 넣어야 돼. 그리고 ㅇㅇ, ㅇㅇㅇ를 적당히 넣어. 그리고..."

됐다 싶을 때, 적당히, 조금...으로 계량되는 할머니의 계량법.

주부 20년 차인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과연 나는 할머니의 손맛을 이어받을 수 있을까?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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